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윤여동설 891

윤여동설 - 가야 왕비 허황옥은 정말 아유타국 공주였을까?

윤여동설 - 가야 왕비 허황옥은 정말 아유타국 공주였을까? 김해 허왕후릉 김해 수로왕릉 삼국유사 기이 제2 가락국기에는, 『건무 24년(A.D.48) 무신 7월 27일 아홉간이 조회를 할 때 말씀을 올리기를 "대왕께서 강림하심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므로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 하고는 왕이 유천간으로 하여금 배와 준마를 가지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망산도는 도읍 남쪽의 섬이고, 승점은 도읍 부근에 있는 나라이다)으로 가게..

카테고리 없음 2007.10.24

윤여동설 - 신라 왕대를 상, 중, 하로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윤여동설 - 신라 왕대를 상·중·하로 구분한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했을까? 삼국사기 경순왕 조에는, "나라 사람들이 신라 시조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를 3대로 구분하는데, 초대부터 진덕왕(진덕여왕)까지 28왕을 상대(上代)라 하고,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 8왕을 중대(中代)라 하며, 선덕왕(宣德王)부터 경순왕까지 20왕을 하대(下代)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시조 혁거세거서간 ∼ 28대 진덕여왕 상대 29대 태종무열왕 ∼ 36대 혜공왕 중대 37대 선덕왕 ∼ 56대 경순왕 하대 삼국유사 왕력 22대 지증마립간 조에는, "(지증마립간)이상을 상고(上古)라 하고, 이하를 중고(中古)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28대 진덕여왕 조에는, "(진덕여왕)이상은 중고(中古)로서 성골(聖骨)의 왕이고, 이하는 하..

카테고리 없음 2007.10.24

윤여동설 - 한반도 대구는 신라의 달구벌(達句伐)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대구는 신라의 달구벌(達句伐)이 아니다 - 최초주장 신라 31대 신문왕은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죽은 문무왕의 장자였다. 따라서 그는 그 아버지 문무왕으로부터 신라본토와 옛 백제 땅 그리고 고구려 남쪽 땅 일부를 물려받아 그 땅을 아홉 주로 나눈다. 넓어진 강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원래의 신라지역을 나누어 상주·양주·강주라하고, 옛 백제지역을 나누어 웅주·전주·무주라 하며, 옛 고구려 남쪽지역을 나누어 한주·삭주·명주라 한다. 신당서에는 이때 신라의 강역이 횡으로 1천리, 종으로 3천리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한반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북성 당산, 진황도, 요녕성 수중, 호로도, 내몽골 고륜기 부근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 북사 신라전에는 ..

카테고리 없음 2007.10.23

윤여동설 - 김수충 그는 신라 어느 왕의 왕자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김수충 그는 신라 어느 왕의 왕자인가? - 최초주장 삼국사기에 그 이름과 신라왕자라고 신분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과연 어느 왕의 왕자인가에 대하여 논란을 빚고 있는 사람이 바로 김수충이다. 그가 성덕왕 13년인 서기 714년에 당나라로 들어가 숙위했다는 기록이 있어 김수충이 성덕왕의 장자였다고 주장하는 성덕왕장자설이 있으나, 모든 상황을 정밀하게 검토해 본 결과 필자는 그가 효소왕의 유복자였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신라 32대 효소왕은 31대 신문왕의 맏아들 이홍(理洪)으로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7년(A.D.687)조에, "봄 2월에 맏아들이 태어났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효소왕은 서기 687년에 태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또 신문왕 11년(A.D.691)조에..

카테고리 없음 2007.10.23

윤여동설 - 신라 서쪽의 요충 대야성(大耶城)은 한반도 합천에 있는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 서쪽의 요충 대야성은 한반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가야산(우두산) 정상의 소머리 형상 : 요녕성 호로도시 대홍라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6년(A.D.555) 조를 보면,   "10월 왕이 북한산을 순행하고 국경을 넓혀서 정하였다.   11월 왕이 북한산으로부터 돌아와서 교서를 내려 거쳐온 주와 군의 1년간 납세를 면제하여 주고, 죄수들로서 2죄(반역죄와 살인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면하여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북한산(필자주 : 지금 진황도 도산) 부근까지 신라가 차지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로부터 90여년 후에 백제 의자왕은 아버지인 무왕이 재위 42년인 서기 641년 3월에 죽자 31대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다음 해 2월 주와 군..

카테고리 없음 2007.10.21

윤여동설 - 통일신라의 9주 5소경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통일신라의 9주, 5소경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신라 9주의 위치 삼국사기 경덕왕 16년(A.D.757) 12월 조를 보면, "사벌주를 상주(尙州)로 고쳐 주1, 군10, 현30을 소속시키고, 삽량주를 양주(良州 또는 梁州)로 고쳐 주1, 소경1, 군12, 현34를 소속시키고, 청주를 강주(康州)로 고쳐 주1, 군11, 현27을 소속시키고, 한산주를 한주(漢州)로 고쳐 주1, 소경1, 군27, 현46을 소속시키고, 수약주를 삭주(朔州)로 고쳐 주1, 소경1, 군11, 현27을 소속시키고, 웅천주를 웅주(熊州)로 고쳐 주1, 소경1, 군13, 현29를 소속시키고, 하서주를 명주(溟州)로 고쳐 주1, 군9, 현25를 소속시키고, 완산주를 전주(全州)로 고쳐 주1, 소경1, 군10, 현3..

카테고리 없음 2007.10.19

윤여동설 - 호태왕 비문 신묘년 기사속의 "왜(倭)"자는 게으를 "권(倦)"자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광개토대왕 비문 신묘년 기사 속 "왜(倭)"자의 원래 글자는 게으를 "권(倦)"자였다 - 최초주장 호태왕 비문에서 해석을 놓고 특히 한·일간에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곳은 영락6년(A.D.396) 병신년 조에 기록되어 있는 신묘년(A.D.391) 기사이다. 원문을 보면,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이6년병신왕궁솔수군토벌잔국) 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사 중의 "왜(倭)" 자가 정말 "왜" 자다 아니다 또는 일본 사람들이 글자를 변조했다, 그렇지 않다 등으로 나뉘어 주장들이 첨예하고, 조문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어디를 중심으로 하고, 어디를 끊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들이 팽팽하다. 이는 비문이 한문..

카테고리 없음 2007.10.19

윤여동설 - 우륵은 한반도 충주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연주했을까?

윤여동설 - 우륵은 한반도 충주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연주했을까? 삼국사기 진흥왕 12년(A.D.551) 3월 조를 보면, "왕이 순행하다가 낭성에 도착했는데, 우륵과 그의 제자인 이문이 음악에 정통하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불렀다. 왕이 하림궁에 머물러 그들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하게 ..

카테고리 없음 2007.10.19

윤여동설 - 혁거세는 어떻게 천년왕조 신라의 건국시조가 될 수 있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혁거세는 어떻게 천년왕조 신라의 건국시조가 될 수 있었을까? - 최초주장 파소(사소라고도 한다)라는 이름을 가진 동부여 공주가 어느 남자와 정을 통해 임신이 되자 그를 어찌할 수 없어 동부여에서 도망쳐 눈수, 동옥저를 거쳐 진한 나을촌에 와서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소벌도리가 그를 알고 데려다 길렀고 아이가 자라자 6부의 촌장들이 추대하여 신라의 왕위에 올렸는데 이가 곧 신라 시조 혁거세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에서 양산 아래 나정 우물 부근에서 흰 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기 위해 남자들이 엎드려 절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고,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가자 거기에 자줏빛 알 한 개가 있었다는 것은 방금 태어난 어린아이가 있었다는 ..

카테고리 없음 2007.10.18

윤여동설 - 신라의 서라벌은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의 서라벌은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 최초주장 [금주고탑 부근의 금주시 옛사진(1932) : 이때까지만 해도 성벽이 존재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북사 신라전을 보면,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땅이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 땅(필자주 : 이는 후대 신라가 낙랑 땅의 일부를 차지했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이 남겨지게 되었다)이다.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하는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진(秦)나라 때 사람들이 고역을 피해 그곳으로 오자 마한이 그 동쪽 경계를 분할하여 주어 그들을 살게 했는데, 그들이 진나라 사람이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 했다고도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 삼국유사 기이 제1 진한 조에는 최치원의..

카테고리 없음 2007.10.18

윤여동설 - 백제 멸망 후 그 땅을 나누어 당나라가 설치한 5도독부의 추정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어떻게 나누어 5도독부를 설치했었을까? - 최초공개 서기 660년 7월 18일 백제의 의자왕은 늙은 몸을 이끌고 태자와 대신·장군들을 이끌고 사비성에서 소정방에게 항복함으로써 678년 백제 왕조는 사직을 문닫게 되고, 의자왕과 그의 아들들, 신하와 장군 등 93명과 백성 1만2천여 명이 당나라로 끌려가게 된다.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백 개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지역을 나누어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의 5도독부로 나누어 통치하게 되는데, 그 위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조에는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대신·장군 88명과 백성 12,8..

카테고리 없음 2007.10.17

윤여동설 - 백제 무왕은 왕흥사를 어디에 세웠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무왕은 왕흥사를 어디에 세웠을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법왕 2년(A.D.600) 정월 조를 보면, "創王興寺 度僧三十人(왕흥사를 창립하고 승려 3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무왕 35년(A.D.634) 조를 보면, "春二月 王興寺成 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 入寺行香(봄 2월 왕흥사가 낙성되었다. 그 절이 물가에 위치했고 채색과 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했다. 왕이 자주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왕흥사를 준공하는데 무려 34년이나 걸렸음을 알게 하는데, 지금까지 기록으로만 전할 뿐 한반도에서 그 왕흥사의 실체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왕 때 백제의 도읍은 사비였으므로 우리는 충남 부여를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라고 생각..

카테고리 없음 2007.10.17

윤여동설 - 백제가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진짜 관미성(關彌城)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가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진짜 관미성(關彌城)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고대의 패수인 지금의 난하 반가구수고 부근의 지형]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난공불락의 요새였다는 백제의 관미성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일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원년(A.D.392) 조를 보면,   "겨울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쳐서 함락 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해수로 둘러져 있기 때문에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한지 20일 만에야 함락시킬 수 있었다(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絶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乃拔)"라고 기록되어 있고,   백제본기 아신왕 2년(A.D.393) 조에는,  "가을 8월 왕이 진무에게 말하기를 '관미성..

카테고리 없음 2007.10.16

윤여동설 - 대륙백제와 반도백제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대륙백제와 반도백제 - 최초주장 백제에 정말 모도왕(牟都王)이라는 왕이 왕위에 오른 적이 있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되고 있는 백제의 왕위는 시조 온조왕으로부터 31대 의자왕까지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중에 모도왕이라는 백제왕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중국 정사서에는 "모도(牟都)"라는 사람이 백제의 왕위에 오른 적이 있고, 남제에서 작위까지도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논쟁의 발단은 남제서 백제국 전에, "(백제 동성왕을)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삼고, 알자복야 손부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책명으로 모대(동성왕)를 죽은 그의 할아버지 모도(牟都)의 뒤를 이어 백제왕으로 봉하며 말하기를 '아 기쁘다. 그대들은 충성심과 부지런함을 대대..

카테고리 없음 2007.10.15

윤여동설 - 북위는 어떻게 백제를 침공할 수 있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북위의 수십만 기병은 어떻게 백제를 침공할 수 있었을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10년(A.D.488) 조를 보면, "위(북위)가 군사를 보내 우리를 침공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패했다" 라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때 백제와 북위간에 전쟁이 있었고 백제가 승전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전쟁이 끝난 후 백제의 동성왕은 남제에 표문을 보내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공이 많은 장군들의 관직을 높여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남제서 백제국 전의 기록을 보면, 『"...... 공에 보답하고 열심히 노력한 것을 위로하여 그 이름을 길이 빛나게 하고자 한다. 가행영삭장군 신 저근(姐瑾) 등 네 사람은 충성스럽게도 온 힘을 기울여 국난을 없앴으니 그 뜻의 굳셈과 과감함이 명장의 등급에 오를만하..

카테고리 없음 2007.10.13

윤여동설 - 백제의 22첨로는 어디를 말하는가?

윤여동설 - 백제의 22첨로(檐魯)는 어디를 말하는가?    우리가 "담로"라고 읽고 있는 글자는 나무목변(木)에 "이를 첨(詹)" 자로서 집의 처마라는 의미의 "처마첨(檐)"자이지 담자가 아니다. 따라서 "첨로"라고 고쳐 읽는 것이 옳다.   처음에 어느 학자가 글자형태가 비슷한 처마첨(檐)자와 멜담(擔)자를 혼동하여 첨로를 담로라고 잘못 읽었고, 그후 어느 역사학자도 옥편을 찾아 확인해 보지 않은 채  앵무새 마냥  계속해 담로라고 되뇌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지금 당장 옥편을 찾아 확인해 본다면 필자의 주장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양서 백제 전을 보면,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檐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檐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치성을 고마라 부르고, 읍을 첨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

카테고리 없음 2007.10.13

윤여동설 -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된 백제 무광왕(武廣王)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된  백제 무광왕(武廣王)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1970년 일본에서 불교의 신기한 이적에 관한 사항을 기록한 관세음응험기라는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는데  그 기록 속에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정사(절)를 새로 지었다(百濟 武廣王 遷都 枳慕密地 新營精舍)" 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백제에 무광왕이라는 왕이 어디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무광왕이라는 왕이 나타나지 않고 또한 지모밀지라는 곳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

카테고리 없음 2007.10.12

윤여동설 - 백제가 지배한 요서 진평현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가 지배한 요서 진평현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송서 백제국 전에는,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 1천여 리에 있다. 그후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했는데,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百濟國 本與高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麗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백제가 중국의 요서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기록에 나타나는 요서 진평군 진평현이 어디를 말하는지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기록은 송서 뿐이 아니라 양나라의 역사서인 양서와 양직공도에도 기록되어 있다. 양서에는, "그 나라(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다. 진(晉)나라 때..

카테고리 없음 2007.10.12

윤여동설 - 온조백제(대륙백제)의 건국지는 지금의 어디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온조백제(대륙백제)의 건국지는 지금의 어디인가? - 최초주장 우리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의 건국설화를 한반도에 비정하여, 비류와 온조가 졸본(환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압록강을 건너고, 패수(대동강)와 대수(예성강 또는 임진강)를 건너, 한산 부아악(서울 북한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비류는 서쪽의 미추홀(인천)로 갔고 온조는 위례성(서울)에 도읍하였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 서울 부근에서 위례성의 확실한 흔적을 찾지 못했고, 인천에서 비류가 도읍 했던 미추홀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으며, 백제가 500여 년 간 도읍 했을 것이라는 지금의 서울지역에서 확실한 백제의 왕릉을 한 곳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 석촌동 적석총을 백제 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적석총은 고구려..

카테고리 없음 2007.10.11

윤여동설 - 대방군(帶方郡)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대방군(帶方郡)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삼국지 한(韓) 전에는, "(후한) 환제와 영제 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군·현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여 군·현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흘러 들어가자 건안(A.D.196∼219)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 남쪽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 장창 등을 보내 유민을 불러모으고, 군대를 일으켜 한과 예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점점 돌아왔고 그 후 왜와 한이 드디어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 경초(A.D.237∼239) 중에 명제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가서 두 군을 평정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대방군이 공손강에 의해 건안 중에 설치되었고, 그 위치는 둔유현의 남쪽이며, 주변에 한과 예 그리고..

카테고리 없음 2007.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