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윤여동설 891

윤여동설 - 중국 사서들이 말해주는 백제(대륙백제)의 중심강역은 과연 어디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중국 사서들이 말해주는 백제(대륙백제)의 중심강역은 과연 어디인가? - 최초주장 송서 백제국전(宋書 百濟國傳) 백제국(百濟國)은 본래 고(구)려(高驪)와 함께 요동(遼東)의 동쪽 1천여 리에 있다. 후에 고(구)려는 요동(遼東)을, 백제는 요서(遼西)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한다. 의희 12년(A.D.416) 백제왕 여영(餘映:전지왕)을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봉했다. 고조가 즉위한 뒤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작위를 올려 봉하였다. 소제 경평 2년(A.D.424) 여영이 장사 장위를 파견하여 대궐에 조공을 바쳤다. 원가 2년(A.D.425) 태조가 조서를 내려, "황제가 말하노라,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카테고리 없음 2008.01.15

윤여동설 - 중국 사서들이 말해주는 고구려의 중심강역은 과연 어디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중국 사서들이 말해주는 고구려의 중심 강역은 과연 어디인가? - 최초주장 후한서 고구려전(後漢書 高句麗傳)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했다. 땅이 사방 2천리이다. 큰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으며 사람들은 산골짜기에 산다. 농사지을 밭이 적어 힘들여 농사를 지어도 자급하기에 부족하므로 습속에 음식을 아끼나 궁실은 잘 짓는다. 동이들이 서로 전해오기를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그런 이유로 말하는 법이 같은 데가 많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때 한쪽 다리는 펴고, 걷는 것이 달리듯 빠르다. 다섯 부족이 있는데, 소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이다. 본래는 소노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미약해진 뒤에는 계루부에서 왕위를 대신하였다. ..

카테고리 없음 2008.01.14

윤여동설 - 고구려와 백제는 왜 개국후 400년간 전쟁을 하지 않았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와 백제는 왜 개국 후 400년 간 전쟁을 하지 않았을까? - 최초주장 고구려의 건국년도는 기원전 37년이고, 백제의 건국년도는 기원전 18년인데, 개국이후 약 400년간 두 나라간에 한번도 전쟁이 없었다. 그러다가 삼국사기 백제본기 13대 근초고왕 24년(A.D.369) 조에, "가을 9월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보기병 2만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진을 치고 군사를 나누어 민가들을 약탈하므로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갑자기 쳐서 이를 깨뜨리고 적병 5천여 명의 수급을 얻었으며,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는 기록으로부터 두 나라간 전쟁기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6대 고국원왕 39년(A.D.369) 조에도..

카테고리 없음 2008.01.11

윤여동설 - 한반도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은 당나라의 승전비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은 당나라의 승전비일까? - 최초주장 충남 부여에 가면 부소산 남쪽에 정림사지가 있고, 그 곳에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정림사지 5층석탑이 있다. 그 탑은 백제 시대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형되는 초기의 석탑으로서 불탑 형식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되어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답고, 안정감이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석탑의 탑신에는 글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백제 멸망을 기록한 논란 많은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다. 당나라가 백제국을 평정하고 세운 비석이라는 의미이고, 현경 5년(A.D.660) 경신년 8월 15일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기록대로라면 이 탑은 불탑이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전..

카테고리 없음 2008.01.03

윤여동설 - 팔만대장경이 한반도 강화도에서 판각된 것이 아니라고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팔만대장경이 한반도 강화도에서 판각된 것이 아니라고라? - 최초주장                                       우리는 지금 한반도 황해도가 옛 대방군이었고, 고려가 황해도 개성을 도읍으로 하고 500년 왕조를 존속했던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서의 기록들은 우리의 상식과는 너무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구오대사 고려 전을 보면,  "고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 하였는데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으로서 경사의 동쪽 4천리쯤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닿으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닿고 북쪽으로는 말갈에 닿는다.   (강역의 크기가) 동서 3천1백 리이고, 남북 2천리이다."..

카테고리 없음 2008.01.02

윤여동설 - 한반도 제주도는 삼국사기 기록 속 탐라국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제주도는 삼국사기 기록 속 탐라국이 아니다 - 최초주장 [한반도 제주 애월읍의 해중고인돌]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0년(A.D.498) 조를 보면, "8월 왕이 탐라(耽羅)에서 조공과 조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그를 치려고 몸소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했다[탐라는 탐모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는 지금 이 사건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해 이때의 백제가 지금의 충청, 전라도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고, 탐라는 곧 제주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당시 백제의 도읍이었던 웅진성 즉 지금의 충남 공주를 출발한 동성왕이 탐라국인 제주도를 침공하기 위해 무진주인 광주쯤에 도착했을 때 탐라에서 사신을 보내 사죄했기 때문에 정벌..

카테고리 없음 2007.12.31

윤여동설 - 한국인은 왜 족보를 만들었을까?

윤여동설 - 한국인은 왜 족보를 만들었을까? 우리는 지금 족보라는 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나라에서 개인의 신분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서류 두 가지 중 하나가 바로 족보이다. 법적으로는 호적이 있고, 다른 하나는 각 가문에서 기록해 내려오고 있는 족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족보는 부모는 물론 출생년월일, 배우자, 자녀, 관직, 사망일시, 죽어 묻힌 묘의 위치 등이 세밀하게 기록되기 때문에 어찌 보면 호적보다도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족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1천년 내지 2천년 전의 조상들로부터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세밀하게 기록해 온 것이 아주 먼 옛날부터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우리가 현재 보고있는 각 성씨들의 족보는 거의 조..

카테고리 없음 2007.12.27

윤여동설 - 고인돌은 한반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윤여동설 - 고인돌은 한반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지금 한반도 어디를 가도 산이고 들이고 묘지를 볼 수 있듯이 어느 동네를 가도 고인돌 한 개쯤은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옛날에는 훨씬 더 많았겠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훼손되어 지금 전해지는 것은 옛날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고인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비교적 근세의 일로서 옛날에는 그것이 무슨 용도로 만들어졌는지 알지 못하고, 사람들은 고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때로는 바위에 걸터앉아 쉬는 휴식장소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아이들은 소꿉장난놀이터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근세에 이르러 그 고인돌에서 돌칼, 돌화살촉, 청동기 등의 부장품이 출토되어 고인돌도 선사시대에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고, 그 용도가 무덤일 ..

카테고리 없음 2007.12.25

윤여동설 - 울산 반구대는 사냥물을 나누던 장소였다?

윤여동설 - 울산 반구대는 사냥물을 나누던 장소였다? 한반도 울산 반구대 근처에 살던 옛 사람들이 강변의 바위에 그림을 새겨 놓았는데, 우리는 지금 그것을 "울산 반구대 암각화"라 부른다. 그들이 언제, 왜 이러한 그림을 바위에 새겨 놓았는지 지금 그것을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무언가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바위 돌을 쪼아 그림을 새겨야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그곳에 온갖 그림을 새겨 놓았을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울산 반구대 암각화인데, 대곡천 중류의 천변에 위치한 넓은 바위 면에 여러 종류의 고래, 여러 종류의 동물, 옛사람모양 등을 새겨 놓은 것이다. 실물을 보고 그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상당히 사실적이다. 그리하여 어느 사람은 그곳이 수렵어로를 잘 하게 해달라고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는..

카테고리 없음 2007.12.23

윤여동설 - 한반도에 한(韓)이 없었다고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韓半島)에 한(韓)이 없었다고라? - 최초주장 우리는 지금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남부에 "한(韓)"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인식하고 "한반도(韓半島)"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반도에 한(韓)은 없었다. 마한(馬韓)도 없었고, 진한(辰韓)도 없었고, 변한(弁韓) 역시 한반도에는 없었다. 경기, 서울, 충청, 전라도는 마한이 아니었고, 경상북도는 진한이 아니었으며, 경상남도는 변한이 아니었다. 한은 방 4천리에 이르는 넓은 강역을 가진 나라였고, 마한에는 무려 54국에 이르는 소국이 있었고, 진한은 12소국, 변한도 12소국으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한왕은 사실 왕이 아니라 78개 제후국을 다스리는 황제였다. 아래 글은 중국 사서들이 말하는 한(韓)에 대한 기록이다. 필자는 방 4천리에 이르는 대..

카테고리 없음 2007.12.18

윤여동설 - 우리의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은 무엇을 가지고 논쟁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우리의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은 왜 우리 고대사에 대해 끝없는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 - 최초주장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승덕시 봉추산 지금 우리 역사의 상고사와 고대사에 대한 정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야사학은 우리 고대사의 중심이 대륙이라 하고, 강단사학은 한반도라 한다. 그리하여 강단사학에서 우리 고대사에 대한 연구발표를 하면 재야사학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거침없이 반도식민사관이라 매도하고, 재야사학에서 우리 고대사에 대해 기존 역사 인식과 다른 새로운 주장을 하게 되면 강단사학은 노인네들이 역사소설을 쓰고 있다고 치부해 버린다. 이들은 왜 같은 우리 역사를 연구하면서도 역사의 중심점을 보는 시각이 대륙과 한반도로 확연히 다르게 ..

카테고리 없음 2007.12.17

윤여동설 - (2)대륙 낙랑군, 평양 낙랑국 분리설은 거짓말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낙랑군은 대륙에 있었고, 낙랑국은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다(후편) - 최초주장 [전편에서 계속] [일제강점기에 발견 되었다는 낙랑 점제현 신사비 - 역사 왜곡을 위해 일제가 갈석산 부근으로부터 옮겨왔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한반도 역사와 대륙역사를 어떻게 연결 지어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지금까지 그 관계를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낙랑군과 낙랑국 그리고 후한 광무제가 살수이남 땅에 설치했던 후한낙랑군과의 관계는 그리 혼란스러워 할 일이 아니다. 기원전 194년 위만이 준왕의 왕검성인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갑자기 쳐서 빼앗아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고조선의 준왕은 그 남쪽으로 도망쳐 지금의 하북성 당산 풍윤부근에 다시 도읍을 정하고 한왕에 올랐다...

카테고리 없음 2007.12.13

윤여동설 - (1) 대륙 낙랑군, 평양 낙랑국 분리설은 거짓말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낙랑군은 대륙에 있었고, 낙랑국은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다(전편) - 최초주장 [하북성 승덕시 경추산] [하북성 승덕시 쌍탑산] [갈석산 입구에 있는 글- 천년의 수수께끼를 어찌 풀 수 있을 것인가?라고 쓰여 있는데, 이 산은 아홉명의 황제들이 올랐다는 원래의 우공갈석이 아니라 후대인 명나라때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위만은 오갈 데 없던 자신의 망명을 받아들여주고 박사로 임명해 나라의 서쪽 변경에 영지까지 내려주었던 고조선 준왕의 은혜를 배반하고, 한나라 군이 열 군데 길로 침공해 오니 왕검성으로 가서 왕을 보호하겠다고 거짓말로 보고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왕검성으로 온 뒤 갑자기 돌변하여 준왕이 있는 왕검성을 공격해 빼앗아 스스로 왕위에 오른 후 사방 수천리에 이르는 땅을 차..

카테고리 없음 2007.12.12

윤여동설 - 신라가 숯때문에 멸망했다고?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가 숯 때문에 멸망했다고? - 최초주장 천년 왕국 신라가 숯 때문에 멸망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 많은 사람들은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매우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49대 헌강대왕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이어져 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 6년(A.D.880) 조에는, "9월 9일에 왕이 좌우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았는데, 경도(서라벌, 금성)의 민가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풍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자니 지금 민간에서는 지붕을 기와로 덮고, 짚으로 해일지 않는다 하고, 밥을 숯으로 짓고 땔감을 때지 않는..

카테고리 없음 2007.12.11

윤여동설 - 포석정은 나라의 운명을 점치던 곳이었다?

윤여동설 - 포석정은 나라의 운명을 점치던 곳이었다? 삼국유사 기이 제2 처용랑과 망해사 조를 보면, 신라 49대 헌강왕 때 "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어 보였는데, 좌우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에게만 보였다. (남산신이) 춤을 추어 보였고, 왕이 손수 사람들 앞에서 춤을 따라 추었다. 신의 이름을 혹은 상심이라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에게 이 춤이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 전해지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 4년(A.D.927)조를 보면, "가을 9월 견훤이 고울부로 신라군을 공격해와 왕이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니 태조가 장수에게 명하여 강한 군사 1만을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 구원병이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견훤이 겨울..

카테고리 없음 2007.12.09

윤여동설 -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의 저작물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의 저작물이 아니다 - 최초주장 삼국유사는 왕명에 의해 만들어진 삼국사기와는 달리 한 승려가 전국에 흩어져 전해지고 있던 비전의 이야기들을 모아 만든 책이라 전해지고 있다. 삼국유사는 우리 상고사로부터 후백제까지의 역사를 먼저 언급하고 그 다음에 불교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어 우리 고대역사와 불교의 역사를 동시에 알 수 있게 하는데, 그 내용이 정사인 삼국사기와는 달리 역사의 전면보다는 잘 보이지 않는 역사 뒷면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어 우리 역사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이 책을 만든 목적이 일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찰의 승려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 또 일연 개인이 아닌 종단차원에서 삼국유사를 만들었..

카테고리 없음 2007.12.07

윤여동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난하 부근 대륙삼국의 역사서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난하 부근 대륙삼국의 역사서이다 - 최초주장 세상이 또 한번의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용틀임을 하고 있는 이때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때다. 우리는 지금 조선시대 사람들처럼 한반도만이 우리 역사의 전부라고 인식하며 웅크리고 살 것인지, 우리 선조들이 내몽골 부근까지를 차지하고 주변 세력들과 끊임없이 다투고 경쟁하며 역사를 이어온 민족이었다고 자부하며 활개펴고 살 것인지 선택해야할 기로에 서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논하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제외하고는 단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삼국사기는 김부식을 비롯한 고려의 학자들이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에 편찬한 신라· 고구려· 백제 ..

카테고리 없음 2007.12.06

윤여동설 - 실패한 백제 최초의 수렴청정 - 팔수태후

윤여동설 - 욕정에 눈이 멀어 명을 재촉한 구이신왕의 어머니 팔수태후   백제 18대 전지왕의 왕비 이름은 팔수이다.  전지왕의 아버지는 17대 아신왕이고 어머니는 해씨였고, 아신왕의 아버지는 15대 침류왕이고 어머니는 진씨였고, 침류왕의 아버지는 14대 근구수왕이고 어머니는 아이부인이었다. [가계도]                                  14대 근구수왕 = 아이왕비(진씨)                                        .............................|.......................                    ↓장자                                            ↓차자             ..

카테고리 없음 2007.12.04

윤여동설화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윤여동설화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피서산장 현판 피서산장(열하행궁) 상제각 우리는 지금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매우 안타까워하는데, 삼국사기를 잘 읽어보면 호동왕자의 아버지인 대무신왕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을 역이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이었던 호동왕자가 남옥저에 놀러 갔는데, 낙랑왕 최리가 그를 보고 "그대의 용모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대가 북국 신왕(대무신왕)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는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자기의 딸로써 아내를 삼게 하였다. 뒤에 호동이 본국으로 돌아와 가만히 사람을 보내 낙랑공주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무기고에 들어가 (낙랑국의) 북과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

카테고리 없음 2007.12.02

윤여동설 - 청나라는 신라 마의태자의 후예가 세운 나라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청나라는 신라 마의태자의 후예가 세운 나라인가? - 최초주장 고려사절요 고려 예종 을미 10년(A.D.1115) 조에는, "생여진의 완안아골타가 황제라 칭하고, 이름을 민(旻)이라 고쳤으며,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그 풍속이 흉노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 성곽이 없고, 산과 들에 흩어져 살며, 문자가 없어 끈을 매어 의사소통을 했다. 그 지방에 돼지, 양, 소, 말이 많은데, 말은 준마가 많다. 사람들은 사납고 날래며 어릴 때부터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쏘기 때문에 장성하여 활을 쏘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며, 말달리는 전쟁연습을 해 경병이 되는데, 여러 부족이 제각각 우두머리라 하여 통일되지 못했다. 그 땅의 서쪽이 바로 거란이고, 남쪽은 바로 우리나라(고려)이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부터 거란과 ..

카테고리 없음 2007.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