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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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왕릉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신라 왕릉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 최초공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한 신라 왕릉의 조성위치 시조 혁거세거서간의 능은 담암사 북쪽(曇巖寺北) 사릉(蛇陵)(박씨) ☆ 삼국유사에는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는 어느 날 왕은 하늘로 올라갔다. 7일 뒤에 유체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는데 왕후 역시 죽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합해서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하므로 오체로서 오릉을 만들고 사릉(蛇陵)이라고 했다. 담엄사(曇嚴寺) 북릉이 이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2대 남해차차웅의 능은 사릉원내(蛇陵園內)(박씨) 3대 유리이사금의 능은 사릉원내(蛇陵園內)(박씨) 4대 탈해이사금의 능은 금성 북쪽 양정구(金城北 壤井丘)(석씨) ☆ 삼국유사에는, 재위 23년인 건초 4년 기묘에..

카테고리 없음 2008.05.22

윤여동설 - 백제 왕릉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윤여동설 - 백제 왕릉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삼국시대 왕릉 중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주인공이 밝혀진 충남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 내부]   백제 역사는 밝혀진 것이 거의 없는 비밀의 역사라고해도 과언이 아닌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당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어 낙양 북망산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의자왕 이외에는 그 왕릉들의 조성 위치에 대해 단 한 줄의 기록도 없다.    왕릉의 조성위치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절요 현종 8년(A.D.1017) 12월 조를 보면, "교서를 내려 고구려, 신라, 백제왕의 능묘는 모두 소재지의 주와 현으로 하여금 수리하게 하고, 땔감을 베는 것을 금하고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리도록 하라"고 했다는 기록이 ..

카테고리 없음 2008.05.20

윤여동설 - 고구려 왕릉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윤여동설 - 고구려 왕릉들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조성했을까? 우리는 지금 고구려가 28명의 왕들이 왕위를 이었던 것은 알고 있으나 확실한 고구려 왕릉은 한곳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 평양의 고구려 왕릉을 추모왕릉(주몽왕릉)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북한 학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고, 집안의 태왕릉을 광개토왕릉, 장군총을 장수왕릉이라 하고 있으나 이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니다. 보장왕의 능은 당나라 장안에 조성했다고 했으므로 실제 고구려 강역 내에는 27명의 왕릉만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요녕성 환인을 졸본이라 했고, 길림성 집안을 국내성이라 했으며, 북한 평양을 평양성, 황성, 장안성이라 함으로써 고구려의 왕릉들을 이곳에서 찾으려했으나, 그곳에 도읍했던 당시 왕들의..

카테고리 없음 2008.05.19

윤여동설 - 칠지도 명문의 올바른 해석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칠지도는 반도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왜왕이 된 그 아들에게 하사한 것이다 - 최초주장 지금 일본의 석상신궁(石上神宮)에는 칠지도(七支刀)라는 칼이 전하고 있는데, 그 칼의 전면에는,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鐵七支刀世辟百兵宜供供侯王☆☆☆☆作(태(화)4년5월16일병오정양조백련철칠지도세벽백병의공공후왕****작)" 이라 되어 있는데, 칠지도가 처음 만들어진 시기와 왕에게 받쳐진 때 그리고 제작자를 금상감으로 새겨 놓았고, 그 칼의 후면에는,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선세이래미유차도백제왕세자기생성음고위왜왕지조전시후세)"라는 명문이 금상감으로 새겨져 있는데, 칼에 글자를 새긴 이유와 받은 사람 그리고 하사한 이유가 적혀 있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 ..

카테고리 없음 2008.05.15

윤여동설 - 한반도 동해 감포의 대왕암은 신라 문무왕릉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동해 감포의 대왕암은 신라 문무왕릉이 아니다 - 최초주장    서기 681년 6월 문무왕은 죽음이 임박해지자 자신이 죽거든 장례를 호화롭게 치르지 말 것이며, 무덤도 커다랗게 만들지 말고, 서역 법식에 따라 화장하여 간단하게 장례를 치르라고 유언하고는 7월 초하룻날 죽게 된다.  그리하여 그 아들인 신문왕은 유언에 따라 문무왕의 시신을 불에 태운 후 동해구의 큰 돌 위에 장사 지냈는데,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바위를 대왕석이라고 불렀고, 신문왕은 문무왕이 동해 바닷가에 짓다가 미처 완공하지 못한 감은사를 완공하여 아버지인 문무왕의 능을 수호하고 영혼의 극락왕생을 비는 원찰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조치한다.   그런데 그 다음해 5월 초하루에 해관인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기를 "동해에 작은 산..

카테고리 없음 2008.05.13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은 신라 김대성이 지은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은 신라 김대성이 지은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삼국유사 효선편 대성효2세부모 신문왕대 조에 의하면, 향전의 기록을 인용하여, "모량리(혹은 부운촌이라고도 한다)의 가난한 여인 경조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하여 성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대성이라 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부자인 복안의 집에 가서 머슴살이를 하여 그 대가로 조그만 밭을 새경으로 받았는데, 그 밭을 절에 시주했다. 얼마 후 대성이 죽었는데, 이날 밤 국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로부터 '모량리 김대성이란 아이가 너의 집에 태어날 것이다.' 하였다. 그로부터 김문량의 아내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왼쪽 손을 꼭 쥐고 있다가 7일만에 폈는데 "대성(大城)"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금간자가 ..

카테고리 없음 2008.05.11

윤여동설 - 새로 밝히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기록의 진실 - 최초주장

새로 밝히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기록의 진실 - 최초주장 혁거세의 출생시기는 기원전 69년 3월1일이었다. 동부여의 해부루왕에게는 사소(파소라고도 한다)라는 이름의 공주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자라서 어느 이름 모를 남자와 혼전관계로 임신이 되어버리자 그 상황을 어찌할 수 없어 동부여에서 도망쳐 동옥저를 거쳐 진한으로 가서 혁거세를 낳게되었고, 그가 13세가 되자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추대하여 왕위에 올리게 되었는데, 이가 바로 신라 건국시조 혁거세거서간이고 때는 기원전 57년이었다.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사로의 시왕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잉태하여 사람들이 의심하므로 눈수로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다시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카테고리 없음 2008.05.05

윤여동설 - 새로 밝히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기록의 진실

윤여동설 - 새로 밝히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기록의 진실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건국년도를 기원전 37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건국과정에 대하여 매우 아리송하게 기록되어 있어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온 후 그곳의 비류수 가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고 또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왕이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의 딸로서 아내를 삼게 했는데, 왕이 죽으매 주몽이 (졸본부여의) 왕위를 이었다는 말도 있다라고 주를 달아 놓기도 했는데, 당시 주몽의 처지를 잘 새겨보면 친구 세 사람과 맨주먹으로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쳐온 주몽이 아무 정치적 기반도 없는 졸본에서 갑자기 고구려를..

카테고리 없음 2008.05.03

윤여동설 - 새로 밝히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록의 진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새로 밝히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 기록의 진실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 장자 ↓ 차자 ↓ 부여무서왕 (실명) ↓ 우태= 소서노 ↓ 백제건국시조 온조왕 ↓ 자(실명 :온조왕보다 먼저 죽었다) ↓ 2대 다루왕 ↓ 자(실명 : 다루왕보다 먼저 죽었다) ↓ 3대 기루왕 ↓ 자(실명 : 기루왕보다 먼저 죽었다) ↓ 4대 개루왕 ................................................I.................................................. ↓ ↓ 5대초고왕 구태 ↓ 6대 구수왕 자(실명) ↓ ↓ 자(실명 : 구수왕보다 일찍 죽었다) 8대 고이왕 .I.............................. ↓ ↓ ↓ 7대 사반왕 자(실명)..

카테고리 없음 2008.04.29

윤여동설 - 비운의 신라 효소왕비 성정왕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비운의 신라 효소왕비 성정왕후와 그 아들 김수충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33대 성덕왕 15년(A.D.716) 조를 보면, "성정(엄정이라고도 한다)왕후를 궁에서 내 보내는데, 비단 5백 필, 밭 2백 결, 벼 1만석, 저택 한 구역을 주었는데, 집은 강신공의 집을 사서 주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사람들은 이 기록을 보고는 성정왕후가 성덕왕의 첫 부인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무언가 잘못이 있어 궁중에서 폐출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는 틀렸다. ☆ 삼국사기의 주에서 성정왕후를 엄정왕후라고도 했다는 것은 오기이다. 성정왕후는 효소왕의 왕비였고, 엄정왕후는 성덕왕의 첫 왕비이다. 성덕왕은 702년에 그의 동복 형 효소왕이 젊은 나이로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704년 5월..

카테고리 없음 2008.04.27

윤여동설 - 홍려정비의 비밀 - 최초공개

윤여동설 - 홍려정비의 비밀 - 최초공개                                                                                  서기 714년 5월 18일 당나라의 홍려경(鴻려卿) 최흔(崔흔)이 말갈에 사신으로 갔다오다가 요동반도 끝인 여순에 이르러 두 개의 우물을 파고 기념으로 우물 옆 바위에 글을 새겨 놓아 사람들이 그 우물을 홍려정(鴻려井)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비석을 홍려정비(鴻려井碑)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그 비석을 일본으로 반출하여 지금은 일본왕궁의 정원에 놓여 있다고 하는데, 그 비문의 내용이 발해와 관련이 있어 중국에서 일본에 비석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일본에서는 묵묵부답이고, 일반에게 공개하지도..

카테고리 없음 2008.04.23

윤여동설 - 백제의 불교전래

윤여동설 - 백제의 불교 전래 삼국사기 백제본기 침류왕 원년(A.D.384) 9월 조에는,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東晋]나라로부터 와서 왕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예우하고 공경하니 불교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흥법편 「난타벽제」조에도 동일한 기록이 있어 서기 384년에 동진으로부터 백제에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때가 372년이었으므로 백제는 그로부터 12년 후에 전해졌고, 고구려를 거쳐 전해진 것이 아니라 동진으로부터 직접 전해졌다는 것도 알 수 있는 기록인 것이다. ☆ 한반도에는 대륙백제와는 별도로 서기 365년경 무광왕이 대륙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쟁탈전에서 패하고 한반도로 건너와 익산 금마에 반도백제를 다시 세우고 ..

카테고리 없음 2008.04.22

윤여동설 - 송서 왜국전 속 의문의 기록 왜5왕 찬, 진, 제, 흥, 무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송서 왜국전 속 의문의 기록 왜5왕 찬, 진, 제, 흥, 무 - 최초주장    송서 권97열전 제57이만동이 왜국전을 보면,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의문의 기록이 들어있다.   기록을 보면,   왜국은 고(구)려 동남 대해 중에 있는데,   고조 영초2년(A.D.421)에  왜왕 찬(讚)이 만리 밖에서 조공을 보내와 그 성의를 가상히 여겨 작위를 주었고,   태조 원가 2년(A.D.425)에 진(珍)이 왕위에 올라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는데, 이때 자칭 "사지절도독 왜(倭)·백제(百濟)·신라(新羅)·임나(任那)·진한(秦韓)·모한(慕韓)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왜국왕"이라고 하며 정식으로 인정해 달라고 하자 송 태조는 "안동장군왜국왕"의 작위를 주었고,   또 진이 "왜..

카테고리 없음 2008.04.18

윤여동설 - 신라의 경순왕은 어느 길을 따라 개경으로 갔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 금성과 고려 개경의 위치 - 최초주장 고려사절요를 보면, 『태조 을미 18년(A.D.935) 10월 임술일(초하루)에 신라왕 김부가 시랑 김봉휴를 보내 들어와서 조회하겠다고 청하므로 왕(태조 왕건)이 섭시중 왕철과 시랑 한헌옹 등을 보내 회보하였다. 11월 갑오일(3일)에 신라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신라도읍 서라벌)를 출발하니 사대부와 서민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향거와 보마가 30여 리에 이어지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서 막혔으며, 구경꾼들이 쭉 둘러서 있었다. 길가에 있는 주와 현에서는 접대가 매우 성대하였고, 왕이 사람을 보내 문안하고 위로하였다. 계묘일(12일)에 신라왕이 왕철 등과 함께 개경에 들어오니 왕이 의장을 갖추고 교외에 나가서 맞이하며 위로하고, 동궁과 여러 재신에게..

카테고리 없음 2008.04.11

윤여동설 - 한반도 북한 평양은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북한 평양은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아니다 - 최초주장 피서산장 옥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조를 보면, 『서기 666년 겨울12월 (당)고종이 이세적으로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를 삼고, 사열소상 백안륙과 학처준으로 이를 보좌케 하고, 방동선과 설필하력으로 요동도행군부대총관 겸 안무대사를 삼고 기타 수륙군 모든 부대의 총관들과 전량사들인 두의적, 독고경운, 곽대봉 등은 모두 이세적의 지휘를 받게 하고 하북 여러 주들의 조세는 모두 요동으로 보내어 군용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26년 정묘(A.D.667) 가을9월 이세적이 신성을 함락시키고 설필하력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앞서 이세적이 요수(遼水)를 건너와서 모든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충이기 때문에 이..

카테고리 없음 2008.04.09

윤여동설 - 백제 방어의 요충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방어의 요충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의 기록인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조를 보면, 『당 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대장군 소정방으로 신구도행군대총관을 삼아 좌위장군 유백영과 우무위장군 풍사귀와 좌효위장군 방효공 등과 더불어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백제로 와서 치게 하고 겸하여 신라왕 김춘추로서 우이도행군총관을 삼아 자기 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당 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 현 산동반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나라(신라)의 서쪽 덕물도에 이르니 신라왕이 장군 김유신을 보내어 정병 5만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왕(백제 의자왕)이 이 소문을 듣고 여러 신하..

카테고리 없음 2008.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