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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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성(國內城)의 진짜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성(國內城)의 진짜 위치 - 최초주장           [영녕고성(고구려 국내성 추정지, 규모 가로세로 각900m, 좌표 동경116도09분35초 북위40도31분25초)]      고구려 2대왕인 유리왕은 그 아버지인 추모왕(주몽왕)으로부터 꽤나 넓어진 강역을 물려받았다.  고구려는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꾼 나라였다. ☆ 주몽은 기원전 58년 봄에 동부여에서 남쪽으로 도망쳐 졸본으로 가서 딸만 셋이 있던 졸본부여 왕의 둘째 공주와 혼인을 했는데, 그 해 10월에 졸본부여의 왕이 죽으면서 그 왕위를 물려받게 되어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다가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어 대제국 고구려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고구려의 건국 시조 추..

카테고리 없음 2008.07.25

윤여동설 -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의 진짜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의 진짜 위치 - 최초주장 [이곳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이 진짜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이다] 많은 사람들은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이 지금의 한반도 압록강 북쪽 요녕성 환인(桓仁)이고, 그곳의 험준한 산꼭대기에 있는 오녀산산성을 졸본성일 것이라 믿고 있다. 학자들이 환인의 오녀산산성이 고구려의 첫 도읍 졸본성일 것이라고 추정하게 된 것은, 환인의 동남쪽이며 호태왕비(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가 서있는 길림성 집안(集安)을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성(국내위나암)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침 집안의 서북쪽 멀지 않은 환인의 험준한 오녀산 정상에 오래된 산성이 있자 그곳을 졸본성일 것이라고 추정했던 것인데, 사실 그곳 오녀산산성에서 고구려의 ..

카테고리 없음 2008.07.22

윤여동설 - 일본천황은 요동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도래인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일본천황은 요동반도에서 살다가 일본열도로 건너간 도래인이다 - 최초주장 지금 일본 사람들은 일본의 천황들이 원래부터 지금의 일본열도에서 수천 년 간 대를 이어 천황노릇을 했으며, 왜국의 건국시조라는 신무천황으로부터 평성천황까지 125대이고, 기원전 660년부터 2008년 현재까지 2,669년 간 이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 유지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왕조라고 자랑한다. 그런데 문제는 고대의 왜국이 지금의 일본열도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라 중국 요녕성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고, 서기 670년에 국호를 일본으로 바꾼 뒤에도 수백년 간 요동반도에 그대로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고대의 왜국은 섬나라가 아니었으나, 지금의 일본은 일본열도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언젠가 요동반도를 떠..

카테고리 없음 2008.07.20

윤여동설 - 백강구 전투는 발해의 난하하류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강구 전투는 발해의 난하하류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 최초주장 백제는 서기 660년 7월 18일 백제 의자왕이 항복을 하고 9월 3일에 왕과 태자, 왕자 ,장군, 대신 등 98명과 백성 1만 2천명이 당나라 장안으로 끌려가게 되자 좌평 복신이 중심이 되어 주류성을 거점으로 삼고 부흥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당나라에 끌려갔던 의자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0월에 이르러 복신은 왜국으로 사람을 보내 왜국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일본서기에는 부여풍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니 풍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되고, 왜국에서는 군사 5천으로 호위하게 하여 부여풍을 백제로 호송한다. 복신 등은 부여풍이 돌아오자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본격적으로 부흥운동을 시작하게 되고, 왜국에서..

카테고리 없음 2008.07.13

윤여동설 - 고대의 왜국은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대의 왜국은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왜국은 서기 670년 12월에 이르러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으로 고쳤는데, 그 이유는 해 뜨는 곳과 가까우므로 그렇게 이름했다고도 하고, "왜(倭)"라는 국호가 좋지 않기 때문에 바꾸었다고도 한다. 이를 보면 고대의 왜국이 곧 일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A.D.670) 12월 조에는, "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以爲名(왜국이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해 뜨는 곳과 가까우므로 이름으로 삼았다고 했다)"이라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 권 220 열전 제145 동이 왜국 조에는, "惡倭名更號日本(왜라는 이름이 나쁘기 때문에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었다)"이라 하였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그..

카테고리 없음 2008.07.10

윤여동설 - 요하문명은 우리 선조들의 동이문명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요하문명은 우리 선조들의 동이문명이다 - 최초주장 지금까지 중국학자들은 황하의 앙소문화와 양자강의 양저문화를 중국 문명의 시원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만리장성 외곽인 요하 부근으로부터 내몽골 적봉 부근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된 홍산문화 때문에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요하문명이 중국 문명과는 전혀 이질적이고,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 있었으며, 문화적으로도 발전된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이 홍산문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졌기 때문이다. 지금 한반도의 경주나 김해에서 기존의 역사와 전혀 이질적인 문화형태인 오르도스형 금관이나 동복이 출토됨으로써 1만리쯤이나 떨어져 있는 중국 북쪽의 오르도스 지방의 문화가 어떻게 한반도 남부에 갑자기 나타나는지 그를 논리..

카테고리 없음 2008.07.06

윤여동설 - 고조선과 삼한은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조선(古朝鮮)과 삼한(三韓)은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중국의 주나라가 평왕 때에 이르러 도읍을 낙양으로 옮김으로써 동주시대가 시작되는데, 이 시기를 역사에서는 춘추전국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이때는 주나라의 세력이 약화되어 가던 때였으므로 제후국이 강성해져 패자의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는데, 이 시기를 춘추시대(春秋時代)라 하며,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54년 사이의 기간을 말한다.  이때 소위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여 한때라도 패자의 자리를 차지했던 다섯 나라인 진(晉), 제(齊), 초(楚), 오(吳), 월(越)이 있었지만 그 외에도 연(燕), 진(秦), 위(衛), 송(宋), 정(鄭), 노(魯), 조(曹), 진(陳), 채(蔡), 기(杞) 등의 나라가 있..

카테고리 없음 2008.07.03

윤여동설 - 말갈(숙신,읍루,물길 여진)은 서랍목륜하(시라무렌강) 부근에 위치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말갈은 서랍목륜하(시라무렌강) 부근에 위치했다 - 최초주장 말갈은 숙신이요, 읍루요, 물길이요, 여진이다. 그런데 이 말갈의 위치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 한반도 동북쪽 연해주지역이라 하고 있으나, 이것이 과연 역사적 사실인 것일까? 후한서 읍루전에는, "읍루는 옛 숙신국이다. 부여의 동북쪽 1천여 리에 있는데, 동쪽은 큰 바다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했으며, 북쪽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라고 그 위치가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읍루전에도, "읍루는 부여의 동북쪽 1천여 리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에 닿았으며, 남쪽은 북옥저와 접했는데,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라고 후한서와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기록을 보고는, 부여는 백두산 북쪽 길림성 지역으..

카테고리 없음 2008.07.01

윤여동설 - 동부여는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동부여는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위 : 내몽골 정람기 동북쪽에 위치한 대형고성터. 지금 중국에서 원 상도유지라고 하고 있으나 사실 이곳은 옛 예성(濊城)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위 : 내몽골 정람기에 위치한 고성터로서 지금 사랑성(四郞城)이라 부르고 있다] 부여는 아주 오래된 나라의 이름이다. 옛날 고조선의 건국시조 단군 왕검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장자는 부루, 둘째는 부소, 셋째는 부우, 막내는 부여(夫餘, 扶餘)였는데, 단군왕검이 왕검성의 서쪽지역을 부여에게 영지로 내려주게 되어 나라 이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부여는 고조선이 멸망하자 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북부여는 고구려 왕실에 혈통이 닿아있고, 졸본부여는..

카테고리 없음 2008.06.29

윤여동설 - 옥저는 어디에 위치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옥저는 어디에 위치했을까? - 최초주장 옥저에는 북옥저, 남옥저, 동옥저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고 있다. 다만 삼국지와 후한서 동옥저전의 기록 즉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 맥과 접했다는 기록을 한반도에 적용하여 동쪽의 바다는 동해로, 개마대산은 개마고원으로, 읍루는 두만강 북쪽 연해주로, 부여는 백두산 북쪽으로, 예, 맥은 강원도로 비정하여 함경남도 함흥 부근을 동옥저로 비정하기도 하고, 또 어느 사람은 함경북도 길주 부근이 동옥저였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서의 기록을 한반도 함경도에 비정한 것일 뿐 실제 그 곳에서 동옥저의 왕궁이나 무덤 그..

카테고리 없음 2008.06.26

윤여동설 - 동예(東濊)는 내몽골 고륜기 부근에 위치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동예(東濊)는 내몽골 고륜기 부근에 위치했다 - 최초주장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동예(東濊)를 우리는 지금 한반도의 강원도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던 나라였다고 이해하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역사적 사실인 것일까? 옛 사서의 기록들에는 예(濊) 또는 예맥(濊貊)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위치에 대하여 후한서는 "예(동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서쪽은 낙랑까지이다. 예(동예),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고조선) 땅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지는 "예(동예)는 남쪽으로는 진한,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다. 지금 조선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백성이 2만 호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후한..

카테고리 없음 2008.06.24

윤여동설 - 대방은 북경 동쪽 준화 부근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대방은 북경 동쪽 준화 부근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우리 삼한 삼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특히 백제 왕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많았던 대방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 그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대방(帶方)이 한반도 내에 위치했었을 것으로 역사를 인식한다. 이는 삼국유사에 남대방의 위치를 "지금의 남원부"라고 주를 달아 놓았고, 또 조선시대의 역사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도호부 조에도 "본래 백제 고룡군인데 후한 건안 중에 대방군이 되었고, 조위 때 남대방군이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록들을 한반도의 전북 남원에 그대로 적용하여 남원 부근이 대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삼국지 한(韓) 전에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카테고리 없음 2008.06.22

윤여동설 - 삼한(三韓)은 지금의 북경 동쪽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한(三韓)은 지금의 북경 동쪽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변진)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 우리는 삼한이 사방 1천리쯤이 되는 한반도 남부를 나누어 서울, 경기, 충청, 전라도가 마한이었다고 하고, 경북일원을 진한이었다고 하며, 경남 일원이 변한이었다고 인식한다. 그런데 삼국지 한(韓)전을 보면, "조선후 준이 왕을 참칭하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고, 그의 좌우 근신과 궁인들을 이끌고 도망하여 바다를 건너 한의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했다. 그의 후손은 끊어졌으나 지금 한인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있다. 한나라 때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철마다 조알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기원전 194년 준왕이 위만의 침공을 받고, ..

카테고리 없음 2008.06.19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었을까? - 최초공개 [위 : 산의 굴곡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축성된 승덕시 피서산장 성벽] 『조선왕 만(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연(燕)나라가 강성할 때 진번조선을 공략하여 귀속시키고 관리를 두고 요새를 쌓았었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 시켰을 때 조선은 요동(遼東)의 외곽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흥기하자 그곳이 멀고 수비하기가 어렵다하여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정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나라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위만)도 1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상투(추결)를 틀고, 만이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달아나 패수를 건너 망명하여 진나라의 빈땅인 상하장에서 살았..

카테고리 없음 2008.06.17

윤여동설 - 왕검성(王儉城) 그곳은 과연 지금의 어디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왕검성(王儉城) 그곳은 과연 지금의 어디인가? - 최초주장                                  우리 역사 5천년의 중심지 왕검성의 위치   왕검성(王險城)이란 고조선 도읍의 이름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의 확실한 위치를 잃어버렸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하든 이 왕검성을 찾아야만 한다.   우리가 이 왕검성의 위치를 꼭 찾아야 하는 것은 이곳이 바로 우리 한민족 5천년 역사의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고, 우리의 고대 강역을 밝힐 수 있는 중심점이기 때문이다.  고조선은 크게 왕검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나눌 수 있는데, 왕검조선은 기원전 2333년 건국되어 기원전 1122년까지 47명의 단군들이 1212년 간 다스린 나라였고, 기자..

카테고리 없음 2008.06.15

윤여동설 -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왜곡하지 않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왜곡하지 않았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 등 고려의 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1145년에 완성한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정사이다. 그런데 이 삼국사기의 내용에 대하여 고려시대 사람들은 아주 잘 만들어진 역사서로 인식하여 송나라에도 보낼 정도로 자신 있는 사서였는데, 조선시대로 들어오면 삼국사기는 졸지에 잘못된 역사서의 대표격으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에는 고려시대 사람들이 삼국사기를 잘 정리된 역사서로 보았고, 조선시대 사람들이 삼국사기를 잘못된 역사서로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으나 우리는 지금까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신라의 건국지를 경주라 하고, 백제의 건국지를 서울부근이라 하며, 고구려의 건국지를 압록강 북쪽이라 하며..

카테고리 없음 2008.06.08

윤여동설 - 삼국유사는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유사는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 최초주장 우리나라 사람 중에 일연의 삼국유사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들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삼국유사가 쓰여진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저자인 일연이 죽은 때가 84세 때인 1289년이었으므로 그 이전 언젠가 삼국유사를 집필했을 것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삼국이전의 우리 상고사에 대하여 다루지 않고, 오직 삼국시대 만을 다룬데 비해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조선, 왕검조선을 시작으로, 부여, 삼한, 한사군, 삼국과 가야, 후백제와 발해까지를 언급하고 있고, 불교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 훨씬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카테고리 없음 2008.06.05

윤여동설 - 삼국 최초의 역사서는 유기, 국사, 서기가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 최초의 역사서는 유기·국사·서기가 아니다 - 최초주장 고구려 최초의 역사서는 "유기(留記)"가 아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11년(A.D.600) 조를 보면, "왕이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옛 역사(古史)를 요약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 국초에 어느 사람이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하여 기사 1백권을 써서 유기(留記)라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요약, 수정하였다. (詔 太學博士 李文眞 約古史 爲新集五券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 이 기록을 보고는 유기가 고구려 최초의 역사서였다고 이해하지만 필자는 이 유기라는 역사서는 원래 고구려의 역사서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국초에 어느 사람이 유기를 썼다고..

카테고리 없음 2008.06.02

윤여동설 - 새로 그려보는 백제 초기의 왕위 계승도

윤여동설 - 새로 그려보는 백제초기의 왕위 계승도 시조 온조왕 ↓자 ?(실명) : 아버지인 온조왕보다 일찍 죽었다. ↓자 2대 다루왕 ↓자 ?(실명) : 아버지인 다루왕보다 일찍 죽었다 ↓자 3대 기루왕 ↓자 ?(실명) : 아버지인 기루왕보다 일찍 죽었다 ↓자 4대 개루왕 ↓자 5대 초고왕 ↓자 6대 구수왕 ↓자 ?(실명) : 아버지인 구수왕보다 일찍 죽었다 ↓자 7대 사반왕 : 약 10세쯤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8대 고이왕에게 왕위를 찬탈 당했다. ☆ 백제 초기의 왕위 계승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잘못되었음이 확실하다. 따라서 그 진실을 찾아야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데, 비록 필자의 추정이 진실까지는 못된다 하더라도 그 진실에 한발자국 다가갈 수는 있을 것이다. ..

카테고리 없음 2008.05.29

윤여동설 - 공주 송산리 6호분은 무령왕 소비(小妃)의 능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공주 송산리 6호분은 무령왕 소비(小妃)의 능인가? - 최초주장 [공주 송산리 고분군 전경] [공주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개봉전 모습] 충남 공주에서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은 백제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도굴되지 않은 채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백제의 높은 문화수준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했고, 특히 중요한 것은 지석이 함께 부장되어 있어 한반도에서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주인공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왕릉이 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혹은 융이라고도 한다)로서 모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신장이 8척이요 눈썹과 눈이 그림 그린 것 같았고, 인자관후하니 민심이 귀부했다. 모대왕이 재위 23년(A.D.501)에 죽으니 즉위했다"..

카테고리 없음 2008.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