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윤여동설 891

윤여동설 - 신라와 백제의 군사용 깃발은 어떻게 생겼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신라와 백제의 군사용 깃발은 어떻게 생겼을까? - 최초공개 신라의 군사용 깃발은 반월형(반달모양)이었다 신라군의 깃발에 관한 것은 삼국사기 권제40 잡지 제9 관직 하 무관 조에 기록되어 전한다. 『금(衿)이란 대개 좌전에서 말하는 소위 깃발표식이다. 시경에는 이르기를 "깃발 무늬는 새를 그렸다"고 하였고, 그 주해에는 "직(織)은 깃발을 말하는 것이요, 조장(鳥章)이란 새의 문장이다" 하였는 바 장수 이하가 모두 옷에 표식을 붙였던 것이다. 사기 한서에 기치(旗幟)라 하였으니 치(幟)와 직(織)이 글자는 다르지만 음은 같다. 주례에 사상의 아홉 가지 깃발에 각각 다른 그림을 그린 것은 그것으로서 깃발을 구별한 것이다. 나라에서는 그것으로서 조정의 위품을 표하고 군사에서도 그 제도를 본 떠 ..

카테고리 없음 2008.10.03

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 위례성과 미추홀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 위례성과 미추홀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기원전 42년 기묘년에 소서노는 어린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졸본의 압록강 나루에서 배에 몸을 실었다. 이때 소서노의 나이 25세였고, 비류는 4-5세정도, 온조는 2-3세 정도였다.[필자주 : 혹은 비류와 온조가 쌍둥이 형제였을 가능성도 있다] 원래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호족 연타발의 딸로서 졸본부여 왕족인 우태에게 시집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둘째 아들 온조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인 우태가 갑자기 죽어 젊은 나이에 아들 둘 딸린 과부가 되어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졸본에서 주몽왕과 재혼한 후 자신이 우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졸본부여의 태자로 봉하려 하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자 졸본을 떠나 압록강을 타고 내..

카테고리 없음 2008.09.19

윤여동설 - 백제시조 온조왕은 주몽의 아들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시조 온조왕은 주몽의 아들이 아니다 - 최초주장 백제 시조 온조왕이 주몽의 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이다. 기록을 보면, "백제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추모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필자주 : 동부여의 오기이다)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부여왕(필자주 : 졸본부여왕이다)이 아들은 없고 다만 딸 삼 형제가 있었다. 왕이 주몽을 만나보고 그가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로서 아내를 삼게 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부여왕(졸본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그의 왕위를 이었다. 주몽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둘째 아들은 온조이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월군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카테고리 없음 2008.09.17

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 그 이후 - 민중왕과 모본왕 대무신왕이 서기 44년 10월에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자 고구려에서는 다음 왕위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대신들의 고민이 깊어지게 된다. 원칙적으로는 대무신왕의 태자로 봉해져 있는 해우(해애루)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순리겠으나 나이가 10여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때가 후한의 광무제에게 살수이남 땅을 다시 빼앗긴 비상시국이었기 때문에 호족들은 결국 12-13세 짜리 어린 왕으로서는 현 상황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죽은 대무신왕의 동생인 해색주를 추대하여 왕위에 올렸는데, 이가 바로 4대 민중왕이다. 그런데 민중왕은 특별한 업적은 남기지 못한 채 재위 5년째인 서기 48년에 젊은 나이로 죽고 마는데, 죽을 때의 나이는 대무신..

카테고리 없음 2008.09.12

윤여동설 - 고구려 3대 대무신왕 무휼의 일생 (2)

윤여동설 - 고구려 3대 대무신왕 무휼의 일생(2)     유리왕이 서기 18년 10월에 죽자 태자인 15세의 무휼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가 곧 전쟁의 신 대무신왕이다.   대무신왕이 왕위에 오른 바로 그 다음해인 서기 19년 정월에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해 오는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때 백제에는 가뭄이 심해 패수와 대수 사이에 사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고, 또 그 다음해인 서기 20년 3월에는 죽은 아버지 유리왕의 사당을 세운다. ☆ 삼국사기에는 이때 동명왕묘를 세웠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9월에는 골구천에서 사냥을 하다가 신마를 잡아 거루라고 이름 붙였고, 10월에는 동부여왕 대소가 머리는 하나요, 몸뚱이가 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는데, 대소왕은 이를 ..

카테고리 없음 2008.09.10

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 무휼의 일생(1)

윤여동설 - 고구려 대무신왕 무휼의 일생(1)     고구려 3대왕인 대무신왕의 성은 해씨요, 이름은 무휼이다.  서기 4년에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 국내위나암에서 유리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다물국왕 송양의 작은 딸이다.  11세에 태자로 봉해졌고, 15세의 나이로 유리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3대 왕위에 올랐다가 재위 27년째인 서기 44년 10월에 죽어 대수촌 벌판에 묻혔다.    앞서 대무신왕의 아버지 유리왕은 기원전 19년 4월에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쳐 와서 고구려의 태자로 봉해졌고, 그 해 9월 고구려 건국 시조 추모왕(주몽왕)이 죽자 뒤를 이어 고구려의 2대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유리왕의 나이는 40세였고 아직 혼인을 하지 못한 노총각이었다.   그리하여 왕위에 오른 다음 ..

카테고리 없음 2008.09.08

윤여동설 - 주몽과 유리가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친 진짜 이유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주몽과 유리가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친 진짜 이유 - 최초주장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은 동부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유화부인이고, 아버지는 북부여 해모수 천제의 증손자인 해불리지(필자주 : 혹시 해불리지의 아들의 오기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이다. 해불리지가 압록강가를 지나다가 하백(어부)의 딸인 유화를 겁탈하여 임신시키게 되고, 유화의 아버지인 하백은 시집도 안간 처녀가 임신했다 하여 자기 집에서 내쫓아버린다. 그리하여 유화는 동부여로 가서 주몽을 낳게되고 그곳에서 살게된다. 세월은 흘러 주몽은 자라 동부여 왕궁의 말지기가 되고, 예씨라는 여인과 혼인을 하였는데, 예씨가 임신 중에 있을 때 갑자기 주몽이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동..

카테고리 없음 2008.08.31

윤여동설 - 신라왕들의 원래 성씨와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신라왕들의 원래 성씨와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 최초공개 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 성은 박(朴)씨 ※ 삼국사기에는 "진한 사람들이 호(瓠)를 박이라 하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과 같았으므로 그의 성을 박(朴)씨라 하였다. 거서간은 진한 말로 왕이란 뜻이다"라고 혁거세거서간의 성씨의 유래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으나 "혁거세(赫居世)"의 의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혁거세가 이름인지 시호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혁거세라는 의미가 "세상을 밝게 비춘다"는 의미이고, 거서간이 왕이라는 의미라고 했으므로 결국 "세상을 밝게 비춘 왕" 이라는 의미가 되므로 "혁거세"는 이름이라기보다는 죽은 후에 붙여진 시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혁거세거서간의 본래 이름은 전해지지..

카테고리 없음 2008.08.29

윤여동설 - 백제왕들의 원래 성씨와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왕들의 원래 성씨와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 최초공개 시조 온조왕(溫祚王) : 백제왕들의 성은 모두 부여(扶餘) 씨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에 "그의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졸본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 씨로 성씨를 삼았다"고 했으므로 백제 왕실의 성씨는 "부여" 씨가 틀림없을 것인데, 중국 사서들은 대개 백제왕들을 "여(餘)" 씨로 기록하고 있고, 주서는 "부여(夫餘)" 씨로, 신·구당서는 "부여(扶餘)" 씨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 삼국 중에서 한 개 성씨로 왕조를 이은 나라는 "백제" 뿐인데, 백제시조 온조왕의 "온조"는 이름일까? 아니면 시호일까? 필자는 이름이 아니라 시호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시호를 사용했고, 동시대인 고..

카테고리 없음 2008.08.27

윤여동설 - 해(解)씨와 고(高)씨 두 성씨로 이어진 고구려왕들의 원래 성씨와 이름 - 최초공개

윤여동설 - 해(解)씨와 고(高)씨 두 성씨로 왕위가 이어진 고구려왕들의 원래 성씨와 이름 - 최초공개 시조 추모왕(鄒牟王) : 해추모(解鄒牟), 해주몽(解朱蒙), 해중해(解衆解) ※ 호태왕 비문에 추모왕이라 기록되어 있어, 추모란 이름이 아니라 시호일 가능성도 있고,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따라서 고(高)씨로서 성씨를 삼았다고 했으나, 실제 초기 고구려 왕실의 성씨는 해모수의 성씨인 "해(解)"씨였고, 고(高)씨로 왕실의 성씨가 바뀐 것은 6대 태조대왕 때부터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주몽의 시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기록한 것은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과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추모왕을 혼동한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이름을 추몽(鄒蒙)이라고도 기록하고 있고, 단..

카테고리 없음 2008.08.25

윤여동설 - 신라왕들의 작위 속에 나타나는 신라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왕들의 작위 속에 나타나는 신라의 위치 - 최초주장     24대 진흥왕(재위 540-576)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A.D.565) : 북제※ 기록에 나타나는 신라 최초의 작위인데, 진흥왕은 555년 10월에 북한산(필자주 : 진황도 도산)을 순수하고 국경을 넓혀서 정했고, 556년에는 비열홀주(필자주 : 함경도 안변)를 설치하고, 557년에는 국원(필자주 : 충주)을 소경으로 만들었으며, 562년에는 대가야(필자주 : 호로도시 수중현 부근)를 쳐 없앴고, 564년에 이르러 해외로 눈을 돌려 북제에 사신을 보내자 북제에서 사신을 보내 진흥왕에게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작위를 주게 되는 것이다.   신라의 왕에게 엉뚱하게도 "진한군공"이 아닌 "낙랑군공"..

카테고리 없음 2008.08.22

윤여동설 - 백제왕들의 작위 속에 나타나는 백제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왕들의 작위 속에 나타나는 백제의 위치 - 최초주장 [거란지리지도인데, 등주, 래주 등 지금의 산동반도에서 북쪽으로 발해를 건넌 곳 즉 지금의 산해관 부근에 고려, 백제, 신라계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그 위치가 아리송한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위치를 제대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 진동장군 영낙랑태수((A.D.372) : 동진 ※ 진서(晉書) 권9 제기 제9 간문제 함안 2년(A.D.372) 조에, "百濟王餘句爲鎭東將軍 領樂浪太守"라고 기록되어 있어 근초고왕의 이름이 부여구(扶餘句) 임을 알 수 있고, 이때 근초고왕이 동진으로부터 받은 작위가 백제 최초의 작위로 보이는데, "영낙랑태수"라는 작위를 받았다는 것은 ..

카테고리 없음 2008.08.20

윤여동설 - 고구려왕들의 작위 속에 나타나는 고구려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왕들의 작위 속에 나타나는 고구려의 위치 - 최초주장 19대 광개토대왕(재위 392-413) 평주목, 요동왕, 대방왕 ※ 양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왕이 평주목이 되었고, 요동과 대방 두 나라의 왕으로 봉해졌다. 고안(필자주 : 시기적으로 광개토대왕을 말하는 것인데,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담덕이라 했다)은 처음으로 장사, 사마, 참군의 관직을 설치했고, 후에는 요동군을 차지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북사에도 "동진 효무제 태원 10년(A.D.385)에 (고)구려가 요동군과 현토군을 공격하니 후연의 모용수가 그 아우 모용농을 보내 (고)구려를 쳐서 두 군을 되찾았다. 모용수의 아들 모용보는 (고)구려왕 안을 평주목으로 삼아 요동과 대방 두 나라의 왕으로 책봉했다. 안이..

카테고리 없음 2008.08.17

윤여동설 - 백제 역사의 미스테리가 풀렸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역사의 미스테리가 풀렸다 - 최초주장       지금까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백제는 매우 미스테리한 나라였다.   왜냐하면 백제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같은 기록들에 부딪치기 때문이었다.  ☆ 옛 사서의 백제 관련 기록들을 모두 한반도에 비정하여 해석하려했기 때문에 미스테리하게 느껴졌을 것인데, 사실 백제는 한반도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동쪽에 (신라가 있고,서쪽에)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 말갈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위치했다고도 기록되어 있고, 신라의 남쪽에는 가야가 있다고도 했고, 마한의 동북쪽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사서들은 백제가 요동 동쪽 1천여 ..

카테고리 없음 2008.08.11

북경은 우리의 옛 땅이었다 - 2008 북경 올림픽에 붙여

북경은 우리 땅 - 2008 북경 올림픽에 붙여 2008 북경 올림픽이 열린다. 그런데 바로 그 북경이 우리의 옛 땅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옛날 고조선은 왕검성(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에 도읍하고 북경 서쪽 태행산맥까지를 차지하고 있었고, 위만조선은 왕검성에 도읍하고 북경 북쪽을 지나 하북성 장가구까지를 차지하고 있었고, 한(삼한)은 북경 동쪽 하북성 당산시 풍윤(월지국)에 도읍하고 사방 4천리에 이르는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한은 풍윤에 도읍하고 있었고, 진한은 요녕성 금주(錦州) 부근, 변한은 호로도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때 북경은 요동군에 속했고, 호로도는 변한 땅이었고, 진황도 도산 북쪽 내몽골 영성, 능원부근은 진번군 땅이었다. 기원전 108년 위만..

카테고리 없음 2008.08.08

윤여동설 - 고구려의 도읍 장안성(長安城) 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의 도읍 장안성(長安城)의 위치 - 최초주장 고구려 20대 장수왕이 황성으로부터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 25대인 평원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는 또 다시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삼국사기 평원왕 28년(A.D.586) 조를 보면, "移都長安城(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때 도읍을 장안성으로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고구려는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옮긴 427년부터 586년까지 160년간 평양성에 도읍한 후 다시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평양성과 장안성은 바로 이웃해 있었다고 보여지므로 평원왕은 같은 평양시내에 또 하나의 왕궁인 장안성을 쌓고 그곳으로 옮겨 살았을 것이다. 하여튼 이때의 국제정세는 수나라가 중국..

카테고리 없음 2008.08.04

윤여동설 - 고구려의 도읍 황성(黃城)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의 도읍 황성의 위치 - 최초공개 고국원왕은 서기 342년 8월 평양성으로부터 환도성으로 옮겨 살았는데, 그 해 11월 연나라 모용황의 침공을 받고 환도성을 함락 당하고, 어머니인 태후 주씨와 왕비가 포로로 잡혀가고 선왕의 유골을 탈취 당하게 되자 그 다음 해인 343년 7월에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옮겨 살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황성(黃城)의 위치에 대하여 "지금의 서경 목멱산 가운데에 있었다" 라고 주를 달아 놓았는데, 고려 때의 서경이란 평양을 말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이때 고국원왕이 환도성을 함락 당하고 평양성이 아닌 평양의 동쪽 목멱산에 위치한 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고국원왕은 334년 8월에 평양성을 증축해 놓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환도성이 불..

카테고리 없음 2008.08.01

윤여동설 - 고구려의 네번째 도읍 평양성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의 네 번째 도읍 평양성의 위치 - 최초주장 고구려의 평양성은 옛 고조선의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었고, 위만조선의 도읍이었으며,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에는 한사군의 한 군이었던 낙랑군의 치소로 활용되다가 대무신왕이 전한 낙랑군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고구려에 편입시켰다. ☆ 사기 조선전의 주에는, "括地志云 高(句)麗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괄지지에는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인데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다. 또 고조선 땅이라고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조선의 왕검성이 곧 낙랑군의 치소였고, 고구려의 평양성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고구려가 동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을 받고 도읍인 환도성이 함락되어 불타버리자 247년 2월에 급히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

카테고리 없음 2008.07.29

윤여동설 - 고구려의 세번째 도읍 환도성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의 세 번째 도읍 환도성의 위치 - 최초주장 고구려 10대 산상왕은 서기198년에 이르러 환도성을 쌓았다. 이는 이때 후한이 말기 현상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산상왕은 상황에 따라서는 요동 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이 환도성을 활용할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후한의 멸망이 거의 기정 사실화되자 209년 10월에 이르러 환도성으로 옮겨살며 요동 쪽으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 우리는 지금 집안 북쪽에 위치한 산성자산성을 환도산성일 것이라 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성이었는데, 그 위치는 지금의 중국 북경시 연경현 영녕진 부근이었다.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비정되는 연경현 영녕고성] 앞서 8대 신대왕은 172년에 ..

카테고리 없음 2008.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