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윤여동설 891

윤여동설 -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신라왕자 등신불 김교각과의 관계를 밝힌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신라왕자 등신불 김교각과의 관계를 밝힌다 - 최초주장 김수충은 효소왕의 유복자 등신불이 되어 지금도 중국 안휘성 화성사 육신보전에 모셔져 있으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장왕보살로 추앙받고 있는 신라왕자 등신불 김교각과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와의 관계를 드디어 필자가 밝혀내었다. 그가 열반에 든지 거의 1300여년만이다. 중국의 어느 학자는 신라왕자 등신불 김교각이 신라왕자 김수충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기록과 일치하지 않고, 또 김수충이 성덕왕의 실질적인 장자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는 김수충이 신라 어느 왕의 아들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에도 김수충이 성덕왕의 장자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상황을..

카테고리 없음 2009.10.11

윤여동설 - 김춘추의 첫 부인은 보량이 아니라 보라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김춘추의 첫 부인은 보량(宝良)이 아니라 보라(宝羅)이다 - 최초주장 신라 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서기 603년에 출생하여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난 그 다음해인 661년 6월에 59세의 나이로 죽어 서라벌(금성) 영경사 북쪽에 묻혔다. 그런데 요즈음 김춘추의 첫 부인이 보량이냐 보라냐를 놓고 의견들이 분분한데, 화랑세기 필사본을 꼼꼼히 읽어본 사람은 보라라고 하고, 대강대강 읽은 사람은 보량이라고 하는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도 보량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어 시청자들은 김춘추의 첫 부인이 보량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김춘추의 첫 부인은 보량의 언니인 보라라는 여인이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김춘추의 첫 부인에 관해서 나타나지 않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을 보면, 진평..

카테고리 없음 2009.10.07

윤여동자료 - 추석의 유래

윤여동자료 - 추석의 유래 역사적으로 음력 8월 15일 즉 추석(한가위)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처음 나타나는데, 그때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명절은 아니었던 듯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3대 유리이사금 9년(A.D.32) 조를 보면, “왕이 이미 6부를 정했는데, 그 가운데를 나누어, 왕의 두 딸을 시켜 각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편을 갈라 가을 7월 16일부터 날마다 아침 일찍부터 넓은 부의 뜰에 모여 베짜기를 하고 밤늦게 파하게 했다. 8월 15일에 이르러 실적이 많고 적은 것을 비교하여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서 이긴 편에게 대접했다. 노래와 춤과 온갖 오락이 다 벌어졌으니 이것을 가배(嘉俳)라 했다. 이때 진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는 소리로 “회소(會蘇),..

카테고리 없음 2009.09.28

윤여동설 - 지금의 북경은 옛 연경, 옛 북평이 아니라 고대의 요동이었다

윤여동설 - 지금의 북경은 옛 연경, 옛 북평이 아니라 고대의 요동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북경과 연경을 동일한 장소로 이해하지만 사실 그것은 틀린 것이다.   북평은 옛날 중국 세력들이 서안이나 낙양 등에 도읍하고 있을 때 그 동북쪽인 하북성 평원 지역을 일컫던 이름이었는데, 춘추전국시대부터 선비족인 연나라가 차지하고 도읍을 하게 되어 연경(燕京)이라고 불리웠던 곳이다.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등 북방세력들이 흥기하여 남하한 후 연경을 차지하고  도읍을 건설했는데, 요나라는 남경석진부라 했고, 금나라는 중도대흥부라 했으며, 원나라는 대도라 했고, 후일 명나라의 영락제가 북경을 건설하고 “북경순천부”라 명명하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연경”이라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연경은 전설 ..

카테고리 없음 2009.09.22

윤여동설 - 원나라의 대도(大都)는 지금의 북경이 아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원나라의 대도(大都)는 지금의 북경(北京)이 아니었다? - 최초주장 [위 : 지금 중국에서는 하북성 장가구시 장북에 있는 위 옛 성터를 원나라의 중도성터(원 중도유지)라 한다] [위 : 중국에서 원 중도성터(원 중도유지]라고 하는 곳의 발굴된 현장모습인데, 사실 이곳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대의 기록에 나타나는 옛 황룡국의 도읍성터이다][좌표 동경114도37분16초 북위41도17분34초] 일반적으로 우리는 원나라의 대도(大都)가 지금의 중국 북경(베이징)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작 중국에서는 원나라의 중도(中都)가 북경이 아닌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700리쯤 떨어져 있는 하북성 장가구시 장북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며, 지금 “원 중도유지(元 中都遺址, 가로세로 각 550m, 동경..

카테고리 없음 2009.09.14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 첨성대는 죽은 자의 환생을 염원하던 곳이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라 죽은 자의 환생을 염원하던 곳이었다? - 최초주장       우리는 지금 경주에 있는 첨성대가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고 자랑한다.   이는 삼국유사 기이 제1 선덕여왕 지기삼사 조의 맨 끝에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첨성대에 관한 기록은 일체 보이지 않고,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신라 첨성대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지금 경주에 있는 첨성대는 사각 기단 위에 원형으로 돌을 돌려 쌓았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지도록 쌓고, 맨 위에는 직선의 돌을 우물정자(井) 형태로 조립해 놓아 안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첨성대의 중간에는 출입..

카테고리 없음 2009.09.10

윤여동자료실 - 사기 흉노열전 번역문

윤여동자료실 - 사기 흉노열전(번역문) 흉노(匈奴)는 그 선조가 하후씨(夏后氏)의 먼 후손인 순유(淳維)라고 한다. 당우(요순) 이전에는 산융(山戎), 험윤(獫狁), 훈육(葷粥)이라 불렀다. 북만에 거주하며 가축을 따라 목축하며 옮겨 다닌다. 그들의 가축으로 많은 것은 말, 소, 양이고, 기이한 가축은 낙타, 당나귀, 노새, 버새, 도도, 탄해 등이 있다. 물과 풀을 쫓아 옮겨 다니며 성곽과 일정한 거처가 없고 농사짓지 않으나 각기 나뉘어진 영역이 있다. 글자가 없고 말로써 약속한다. 어린 아이도 능히 양을 타고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쏘며, 조금 더 자라면 여우나 토끼를 쏘아 잡아먹는다. 장정들의 힘은 능히 활을 당길 수 있고 모두 무장기병이 된다. 그들의 풍속은 여유로울 때는 가축을 기르며, 짐승 사냥..

카테고리 없음 2009.08.23

윤여동설 - 연운 16주는 우리 고조선의 옛 땅이었다 -최초주장

윤여동설 - 연운16주는 우리 고조선의 옛 땅이었다 - 최초주장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진개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빼앗아 설치했다는 연5군 지역이 천년 후쯤 후진이 거란에게 할양했던 연운16주와 거의 동일한 지역이라는 것이 드디어 필자에 의해 밝혀졌다. 이는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어디까지였느냐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연운 16주는 후당의 금군장관으로서 하동절도사와 북경유수를 겸하고 있던 석경당이 936년에 거란의 지원을 받아 후진(後晉)을 세운 대가로 거란에 할양한 땅인데, 할양 이후 그 땅을 놓고 동이족과 한족이 세운 나라들 사이에 오랜 세월 분쟁의 불씨가 되었던 곳이다. ★ 산서성 중북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이 장성의 흔적을 진시황 때 모두 새로 쌓은..

카테고리 없음 2009.08.12

윤여동설 -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 만번한은 지금의 어디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조선과 전국시대 연나라의 국경이었던 만번한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 - 최초주장 삼국지 한(韓) 전을 보면 위략(魏略)의 기록을 주로 달아 놓았는데, 그 기록을 보면, 『위략에 이르기를, 옛날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가 있었다. (昔箕子之後 朝鮮侯)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동쪽을 공략하려 하였는데,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주 왕실을 존속시켜주기 위하여 거꾸로 연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다가 그 대부인 예가 간하여 중지하고, 예로 하여금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중지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조선후의)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져 연나라가 드디어 장수 진개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 리(필자주 : 사기 흉노전에는 1천여리라 기록되..

카테고리 없음 2009.08.06

윤여동설 - 한반도의 차 시배지는 과연 어디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의 차 시배지는 과연 어디일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에는 지리산에 대하여, 신라본기 42대 흥덕왕 3년(828) 12월 조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문종이 인덕전에서 그를 불러 차등을 두어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 차(茶)가 선덕왕(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매우 유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 삼국사기에는 지리산(地理山)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한반도의 지리산은 지이산(智異山)이라 쓰고 지리산이라 읽는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지리산(智異山)이 진주목의 서쪽 1백리에 위치한 산이라고 하였으나 지금 한반도 ..

카테고리 없음 2009.07.27

윤여동설 - 가야산 해인사가 원래는 요녕성 호로도에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가야산 해인사가 원래는 요녕성 호로도에 있었다 - 최초주장 [가야산 정상 부근에 나타나는 소머리 형상] 가야산 해인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40대 애장왕 3년(A.D.802) 조에 “8월 가야산 해인사를 창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해인사가 창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200여년 전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한반도 경남 합천 가야산에 있는 해인사가 바로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된 가야산 해인사라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는 원래 한나라 때의 낙랑 부근에서 건국된 나라였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이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가야산 해인사에 관한 기록은 해석을 전혀 다르게 할 수 있게 된다. 즉 원래의 가야산..

카테고리 없음 2009.07.03

윤여동설 - 고구려 900년설과 700년설의 진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900년설과 700년설의 진실 - 최초주장 고구려가 건국된 지 705년 만에 멸망했다고 하는 것이 "고구려 700년설"이고, 900년 만에 멸망했다고 하는 것이 "고구려 900년설"이다. 고구려 700년설은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어 서기 668년에 멸망함으로써 705년간 존속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대두된 설이고, 고구려 900년설은 신당서 고구려전에 시어사 가언충이 당 고종에게 보고하는 말 중에 "고구려가 한(漢)나라 때부터 나라가 있어 지금 900년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대두된 설이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조에는 또 고구려가 멸망한 후 문무왕이 신라로 망명해 온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삼는 책명문에 "공의 태조 중모왕은 덕을 북쪽 산에 쌓고 ..

카테고리 없음 2009.06.04

윤여동설 - 고구려 장수왕릉은 하북성 흥륭현 수왕분(壽王墳)?

윤여동설 - 고구려 장수왕릉은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수왕분(壽王墳)에 조성되었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장자이다.   삼국사기는 그에 대하여, “체격이 우람하고 기개가 호탕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장수왕은 서기 394년에 출생하여 409년인 16세에 태자로 봉해졌고, 20세인 413년에 황성(평양동황성)에서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때 중국에는 남쪽에 동진(東晋)이 있었고, 북쪽은 5호 16국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는데, 탁발규의 북위와 선비족이 세운 북연이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장수왕은 왕위에 올라 동진에 사신을 보내니 동진의 안제가 그에게 “고구려왕 낙안군공”이란 작위를 보내온다.       그러다가 420년에 이르러 남쪽에는 동..

카테고리 없음 2009.05.29

윤여동설 - 고구려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 - 최초공개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과연 지금의 어디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주장이 있어왔다. 지금의 북한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는 조선시대부터의 주장으로부터 압록강 북쪽 요양 또는 요하서쪽 조양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는 필자의 주장 등이 있는데, 이처럼 주장들이 많다는 것은 아직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을 정확히 찾지 못했다는 말과 같다. 만약 고구려의 평양성을 정확히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 고대역사의 거의 전부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고조선의 왕검성이었기 때문에 고조선의 중심지를 알 수 있게 되고, 위만조선, 한사군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되며, 삼한, 삼국..

카테고리 없음 2009.05.25

윤여동설 - 발해 5경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발해 5경의 위치 - 최초공개 [발해 5경을 위 지도와 같이 비정했을 경우 사서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신당서 북적 발해전(新唐書 北狄 渤海傳)에는, "(발해의) 국토는 5경 15부 62주이다. 숙신의 옛 땅으로 상경(上京)을 삼으니, 용천부(龍泉府)이며,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의 3개주를 다스린다. 그 남부를 중경(中京)으로 삼으니, 현덕부(顯德府)이며,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의 6개주를 다스린다. [필자주 :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중경에서 상경까지 300리 떨어졌다고 했다] 예, 맥의 옛 땅으로 동경(東京)을 삼으니, 용원부(龍原府)인데, 책성부라고도 한다.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

카테고리 없음 2009.05.10

윤여동설 - 발해국의 중심강역은 연해주가 아니라 대흥안령산맥이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발해국의 중심강역은 연해주가 아니라 대흥안령산맥이었다 - 최초주장 삼국유사 말갈 발해(발해국) 조를 보면,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발해(발해국)는 본래 속말말갈이다. 그 추장 조영(祚榮)에 이르러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스스로 진단(震旦)이라고 했다. 선천 연간(현종의 임자년:712)에 비로소 말갈(靺鞨)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渤海)라고 일컬었다. 개원 7년(己未:719)에 조영이 죽자, 그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했다. 세자가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명황은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했다.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드디어 해동(海東)의 큰 나라가 되었다. 그 땅에는 5경(五京), 15부(十五府), 62주(六十二州)가 있었다. 후당 천성 초년에 거란(契丹)이 이곳을 쳐서 깨뜨렸..

카테고리 없음 2009.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