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윤여동설 892

윤여동설 - 정감록에서 800년 도읍지로 지목한 계룡산은 한반도 충남 계룡산을 말하는게 아니다

윤여동설 - 정감록에서 800년 도읍지로 지목한 계룡산은 한반도 충남 계룡산을 말하는게 아니다 [위 : 정감록에서 새로운 800년 도읍지로 지목한 대륙 계룡산과 그 남쪽 평원] [위 : 한반도 계룡산 남쪽 신도안. 나라의 도읍이 들어설 만한 평지 공간이 없는 산악지역이다] 정감록은 한민족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는 예언서인데, 한양 도읍기가 지나면 계룡산 남쪽에 새로운 800년 도읍지가 건설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 정감록에는 또 계룡산 800년 도읍기가 지나면 가야산 1,000년, 전주 600년, 그 후 다시 송악이 도읍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새로운 800년 도읍지는 한반도 계룡산 남쪽에 건설될 것이라고 정감록을 해석했다. 어떤 사람은 신도안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는 지금의 충남..

카테고리 없음 2010.11.08

윤여동설 - 백제의 탄현(炭峴)과 황산(黃山)을 찾았다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탄현(炭峴)과 황산(黃山)을 찾았다 - 최초주장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이미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階伯)으로 하여금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가서 신라군과 싸우도록 했는데,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 결국은 패하고 계백이 죽음을 당했다” 위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A.D.660) 조의 황산벌 전투에 관한 기록으로서 이때 신라군은 5만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백제가 멸망한지 1,3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전쟁기록 속에 나타나는 탄현과 황산을 정확히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탄현과 황산을 찾는다고 뛰어들게 되어 각각..

카테고리 없음 2010.11.01

윤여동설 - 백제의 한성(漢城)은 한곳이 아니라 남한성과 북한성이 있었다

윤여동설 - 백제의 한성(漢城)은 한곳이 아니라 남한성과 북한성이 따로 있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한성(漢城)”을 “백제의 5백년 도읍지”라 인식하고 있는데, 그것이 과연 역사적 진실인 것일까? 백제의 온조왕은 기원전 18년에 위례성(하남위례성)에 도읍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다가 기원전 5년에 도읍을 한수의 남쪽(필자주 : 한수의 하류로 옮겼다고 했어야 정확한 표현이었다) 남한성으로 옮기게 된다. ☆ 백제 건국설화를 보면, 온조왕은 미추홀로 가서 나라를 세웠던 형인 비류왕이 죽자 그 신하들과 백성들을 십제에 귀속시키고 미추홀의 백성들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고 전하는데, 아마 비류왕과 온조왕은 쌍둥이 형제였던 듯 하다. 이때 온조왕이 도읍을 옮기게 된 이유는 그가 전해인 기원전..

카테고리 없음 2010.10.25

윤여동설 - 백제의 마수산(마수성)은 하북성 평천(平泉)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마수산(마수성)은 하북성 평천(平泉) - 최초주장 [마수산(馬首山] : 하북성 평천 부근의 말머리 형상 지형] 당태종 고구려 침공 때 주둔했던 마수산(馬首山)을 찾은 김에 우리의 백제에도 동일한 이름의 마수산(馬首山)이라는 산이 있었으므로 백제의 마수산도 찾아보기로 하자.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8년(B.C.11) 7월 조를 보면, “축마수성(築馬首城)”이라고 하여 이때 마수성이라는 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고, 또 다루왕 3년(A.D.30) 10월 조를 보면, "동부 흘우가 말갈과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승리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상으로 말10마리와 벼5백석을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의 마수산이 말갈과의 접경 지역이었음을 ..

카테고리 없음 2010.10.18

윤여동설 - 당 태종 고구려 침공시의 주둔지 마수산(馬首山)을 찾았다

윤여동설 - 당 태종 고구려 침공시의 주둔지 마수산(馬首山 : 말머리산)을 찾았다 [마수산으로 비정되는 곳으로서 말이 구유에 입를 넣고 먹이를 먹고 있는 것 같다. 하필 그곳에 도로가 나고 건물이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서기 645년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을 하기 위..

카테고리 없음 2010.10.11

윤여동설 - 경주의 성덕대왕신종은 원래의 종을 축소하여 만든 모사품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경주의 성덕대왕신종은 원래의 종을 축소하여 만든 모사품인가? - 최초주장 경덕왕이 12만근(3만kg)의 황동을 내 놓아 혜공왕 때 완성했다는 성덕대왕신종의 실제 무게는 18,908kg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세간에서 그 종소리가 어린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와 비슷하다하여 에밀레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원래 봉덕사에 안치했다고 하여 봉덕사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탑상 제4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 조에 기록되어 그 전말이 전해졌다. 기록을 보면, “신라 35대 경덕대왕이 천보13년 갑오(A.D.754)에 황룡사종을 주조했는데, 길이는 1장 3촌, 두께는 9촌, 무게는 49만7,581근(124,395kg)이었다. 시주는 효정이왕 삼모부인이..

카테고리 없음 2010.10.04

윤여동설- 정확하게 그린 백제의 왕위계승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정확하게 그린 백제의 왕위계승도 - 최초주장 [무너져 가고 있는 대륙백제가 쌓은 장성의 흔적] [백제 왕위계승도] 장 시조 온조왕 자 ↓ 계 자(실명 :온조왕보다 먼저 죽었다) 승 ↓ 기 2대 다루왕 ↓ 자(실명 : 다루왕보다 먼저 죽었다) ↓ 3대 기루왕 ↓ 자(실명 : 기루왕보다 먼저 죽었다) ↓ 4대 개루왕 ↓ (장자파) (차자파) ................................................I.................................................. ↓ ↓ 5대 초고왕 구태 (仇台) ↓ ↓ 6대 구수왕 자(실명) ↓ ↓ 왕 자(실명 : 구수왕보다 일찍 죽었다) 8대 고이왕 위 .I.............................

카테고리 없음 2010.10.01

윤여동설 - 백제 무왕이 어릴 적 살았던 마룡지를 찾았다

윤여동설 - 백제 무왕이 어릴 적 살았던 마룡지(馬龍池)를 찾았다 백제 30대 무왕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무왕의 이름은 장이니 법왕의 아들이다. 풍채가 영특하고 체격이 컸으며 그 의지와 기상이 호걸스러웠다. 법왕이 왕위에 오른 다음해에 죽어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유사 기이 제2 무왕 조에는,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서쪽의 오기?)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어릴 때의 이름은 서동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항상 마를 캐다 팔아 살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불렀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 무왕의 신분에 대해서는 두 기록이 각각 다른데 필자는 무왕이..

카테고리 없음 2010.09.19

윤여동설 - 백제의 위례성 - 하남위례성 - 남한성 - 한성 - 북한성의 관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위례성 - 하남위례성 - 남한성 - 한성 - 북한성의 관계를 새롭게 정리한다 - 최초주장 [백제 한산 부아악 추정지] 삼국사기 기록 중 백제의 위례성, 하남위례성, 남한성, 한성, 북한성의 관계에 관한 기록들은 매우 혼란스럽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백제의 도읍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사람마다 주장들만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를 보면,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가지고 미추홀(弥鄒忽)로 돌아가서 살게 되었고,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서 보좌역을 삼아 국호를 십제라 하였는데, 이때는 전한 성제 홍가 3년(B.C.18)이었다”고 기록함으로서 비류가 세운 나라의 도읍은 미추홀이었고, 온조십제의 최초 ..

카테고리 없음 2010.09.06

윤여동설 - 우수주(우두주)는 한반도 강원도 춘천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우수주(우두주)는 한반도 강원도 춘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지리지 삭주(朔州) 조를 보면, “삭주는 가탐의 고금군국지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동남쪽과 예의 서쪽이 옛날 맥의 지역’이라 하였으니 대개 지금 신라의 북쪽삭주(盖今新羅北朔州)인 듯하다. 선덕왕(선덕여왕) 6년인 당 정관 11년에 우수주(牛首州)로 만들어 군주를 두었고[문무왕 13년인 당 함형4년에 수약주를 설치하였다고도 한다],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춘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춘천도호부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맥국인데 신라의 선덕왕(선덕여왕) 6년에 우수주(우두주라고도 한다)로 만들고 군주를 배치했다. 문무왕 13년에는 수약주(오근내라고도 하고 수차약이라고도 한다)라고 불렀고..

카테고리 없음 2010.08.30

윤여동설 - 우공갈석(禹貢碣石)은 북경 서남쪽 지금의 보정시 낭아산(狼牙山)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대의 우공갈석(禹貢碣石)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낭아산(狼牙山) - 최초공개           우공갈석은 상산(항산) 구문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중국 역사상 9명의 황제들이 올랐다는 유명한 산이다.  진(秦) 시황이 올랐고,   진 2세 호해가 올랐다고 하며,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기 전인 기원전 110년에 올랐고,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 즉 위 무제가 올라 “관창해(觀滄海)”라는 시를 읊었다 하고,   진(晉) 선제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할 때 창려를 거쳐 갈석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진시황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북위 문성제,   북제 문선제가 올랐고,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올랐다고 하고,   당 태종 역시 고구려를 침공할 때 올라 “춘..

카테고리 없음 2010.08.22

윤여동설 - 북송의 휘종과 흠종이 잡혀와 살다 죽은 태백산(장백산) 동쪽 오국성(五國城)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북송의 휘종과 흠종이 포로로 잡혀와 살다 죽은 태백산(장백산) 동쪽 오국성(五國城)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북송의 휘종과 흠종은 1126년 도읍인 개봉을 함락당하고 포로로 잡혀 금나라로 끌려가 억류생활을 하다가 죽은 비운의 황제들이다. 나라를 망쳤으니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죄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역사에서는 이를 정강의 변이라 부른다. 이때 금나라는 북송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황후, 황태자, 친왕, 공주, 황족 등 무려 3,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을 북쪽으로 끌고 와 태백산(장백산) 동쪽 오국성(五國城)에 억류하고는, 휘종에게는 중혼후(重昏候), 흠종에게는 혼덕공(昏德公)이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이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죽게 된다. 금나라는 후일 휘종이 죽은..

카테고리 없음 2010.08.09

윤여동설 - 내몽골 파림좌기는 요(거란) 상경임황부가 아니라 발해의 상경용천부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내몽골 파림좌기는 요(거란) 상경임황부가 아니라 발해의 상경용천부이다 - 최초주장 (위 : 파림좌기의 발해 상경용천부 터로서 중국에서는 이곳을 요 상경임황부 터라고 하고 있는데 거짓말이다)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라는 의미는 요수(遼水)를 중심으로 그 동쪽과 서쪽이라는 의미일 것인데, 거란족이 도읍을 임황(상경임황부가 된다)에 정하고는 국호를 “요(遼)”라고 하게 된다. 국호를 새로 정할 때 아무 인연도 없고, 역사, 지리적 관계도 없이 아무렇게나 정했을 리는 만무하고 거란족과 “요(遼)”가 무언가 특별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국호를 “요(遼)”라고 정했을 것인데, 사서들은 거란족이 "요택(遼澤)"에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조선(이씨조선을 말함)의 경우에도 처음에 국호를 정할 때 ..

카테고리 없음 2010.08.02

윤여동설 - 송막기문을 지은 홍호의 유배지 냉산(冷山)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송막기문을 지은 홍호의 유배지 냉산(冷山)을 찾았다 - 최초공개 고려사절요 예종 10년(A.D.1115) 조를 보면, 『생여진의 완안아골타가 황제라 칭하고 이름을 민이라 고쳤으며,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 풍속이 흉노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 성곽이 없고, 산과 들에 흩어져 거주하며 문자가 없어 끈을 매어 약속한다. 그 지방에 돼지, 양, 소, 말이 많은데, 말은 준마가 많다. 사람들은 사납고 날래며 어릴 때부터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쏘기 때문에 장성하여 활을 쏘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며, 말을 달리고 전투를 익혀 강병이 되는데, 여러 부락이 제각각 우두머리라 하여 통일이 되지 못하였다. 그 지방이 서쪽은 거란이요, 남쪽은 우리나라(고려) 땅이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부터 거란과 우리 조정을 ..

카테고리 없음 2010.07.26

윤여동설 - 고대의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일 가능성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대의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일 가능성- 최초주장 삼국유사에는 환웅천왕이 그를 따르는 사람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그곳을 신시(神市)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왕들이 태백산에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한민족은 아주 먼 옛날부터 태백산을 신성한 성산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신라의 건국지는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이었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주몽이 태백산 동남쪽에 위치한 행인국을 쳐서 병합시켰다는 기록도 보이고, 또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발해가 태백산 동북쪽에서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 신당서 흑수말갈 전에는 속말부의 남..

카테고리 없음 2010.07.19

윤여동설 - 전연 모용황의 고구려 환도성 침공로를 밝힌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전연 모용황의 고구려 환도성 침공로를 밝힌다 - 최초공개 [방산 유리하진 부근의 고죽성터와 용성(화룡성)터 추정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6대 고국원왕 12년(A.D.342) 조를 보면, “봄2월 환도성을 보수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왕이 환도성으로 옮겨왔다. 겨울 10월 연나라(전연) 임금 황(모용황)이 용성(龍城: 화룡)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장군 한(모용한)이 황(모용황)에게 청하기를 ‘고구려를 먼저 빼앗은 다음 우문(우문선비)을 쳐부숴야만 중원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고구려로 가는 길은 두 길이 있는데,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기 때문에(?) 군사들이 북쪽(?) 길로 가자고 하였다. 한이 말하기를 ‘적국이 우리의 대군이 반드시..

카테고리 없음 2010.07.12

윤여동설 - "송막(松漠)"의 위치를 밝힌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송막(松漠)”의 위치를 밝힌다 - 최초공개        역사 연구를 하다보면 “송막(松漠)” 또는 “송막지간(松漠之間)”이라는 지명이 자주 언급된다.  특히 거란의 역사를 보면 어김없이 “송막지간(松漠之間)”이 언급되고,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인 서기 696년에 거란인 송막도독 이진충과 귀성주자사 손만영이 영주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한 기록도 보인다.   또 남송의 홍호가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휘종과 흠종의 송환을 위해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냉산(冷山)이라는 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돌아와서 송막기문(松漠記聞)이라는 견문록을 써 송막이라는 지명이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는데, 그 송막 또는 송막지간이라는 곳이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카테고리 없음 2010.07.05

윤여동설 - 고려 사신들의 연경(燕京) 사행로를 밝힌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 사신들의 연경(燕京) 사행로를 밝힌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 백제 조를 보면, 『통전에 이르기를 “주몽이 한나라 건소2년에 북부여[필자주 : 동부여의 오기이다]로부터 동남방[필자주 : 서남쪽의 오기이다]으로 가서 보술수를 건너 흘승골성에 이르러 자리잡고 국호를 구려라 하고 고로써 성씨를 삼았다” 고 하였으며, ☆ 삼국사기 찬자들이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는 통전의 기록이란 통전 권186 변방2 동이하 고구려 조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곳에는 “朱蒙棄夫餘 東南走渡普述水 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句麗 以高爲氏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주몽이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달아나 보술수를 건너 흘승골성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라 하고 고로서 성씨를 삼았다” ..

카테고리 없음 2010.06.28

윤여동설 - 위나라 관구검의 환도성 침공로와 동천왕의 파천로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나라 관구검의 환도성 침공로와 동천왕의 파천로 찾기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1대 동천왕 20년(A.D.246) 조를 보면,  “가을8월 위(魏)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토(玄菟)로 나와서 침입하였다.   왕이 보․기병 2만으로 비류수(沸流水) 상류에서 맞받아 쳐서 적군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군사를 이끌고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 적군을 쳐부수어 또 3천여 명을 죽이고 붙잡았다. 왕이 모든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위나라의 많은 군사가 도리어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도다. 관구검은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아귀 속에 있도다’하고 곧 철기군 5천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쳤다.   관구검이 ..

카테고리 없음 2010.06.21

윤여동설 - 북연의 도읍 용성(화룡)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북연의 도읍 용성(화룡)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북연의 도읍 용성(화룡)이 어디인지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도 아닌 북연의 용성(화룡)을 찾으려 애쓰는 것은 그곳이 고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유성(柳城)이고, 고구려 장수왕 때의 고구려 서쪽 경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용성의 위치를 찾으면 옛날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의 진개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1천여리(2천여리라고도 한다)의 땅을 빼앗아 설치했다는 연5군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어 고조선의 옛 땅이 어디까지였는지도 알 수 있어 우리의 고대역사 해석을 지금과는 전혀 새롭게 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고대역사에서 지금까지 확실하게 밝히지 못했던 잃어버린 고리 하나를 찾아 역사 복원에 한발 가까..

카테고리 없음 2010.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