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윤여동설 891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국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국 - 최초주장 대무신왕은 고구려의 3대왕으로서 2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유리왕의 장자 즉 다물후 송양의 큰딸이 유리왕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 도절은 일찍 죽었고, 유리왕의 계비 화희가 낳은 둘째아들 해명은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로 도읍을 옮기려 할 때 그를 반대하다가 유리왕으로부터 스스로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죽었다. 그리하여 유리왕이 다물후 송양의 작은 딸을 다시 왕비로 맞아들여 낳은 아들이 바로 대무신왕 무휼이었다. 무휼(대무신왕)은 자라 1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모본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고, 또 갈사왕의 손녀를 둘째 왕비로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호동왕자였다. 이때까지도 원비였던 모본호족의 딸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아들을 낳게된다. ..

카테고리 없음 2009.04.21

윤여동설 - 혁거세거서간 탄생설화와 신라건국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혁거세거서간 탄생설화와 신라건국 - 최초주장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 신라 시조 혁거세거서간의 혈통이다.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우물 옆 숲 가운데에 말이 꿇어앉아 울고 있었다. 즉시 가서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를 쪼개니 그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오므로 이를 거두어 길렀다. 그의 나이 10여세가 되니 매우 숙성하여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이 신기하고 이상하므로 떠받들어 높이더니 이 때에 이르러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혁거세거서간의 출생에 대해 신화적으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 조에는, "전한 지절 원년..

카테고리 없음 2009.04.19

윤여동설 - 고인돌과 미송리형 토기는 고조선 고유문명의 흔적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인돌과 미송리형 토기는 고조선 고유문명의 흔적 아니다 - 최초주장 지금 학자들은 비파형동검과 미송리형토기 그리고 고인돌을 고조선의 대표적인 3대 표지유물이라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곳은 모두 고조선의 강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 중 고인돌과 미송리형토기는 고조선을 대표하는 표지 유물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비파형동검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요하서쪽 홍산문화권 지역이고,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곳은 한반도 남부지역이며, 미송리형토기는 압록강변인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고인돌이나 미송리형 토기를 고조선의 표지유물로 규정하게된 것은 북한 평양이 고조선의 도읍 왕..

카테고리 없음 2009.04.10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동부도위,낙랑남부도위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동부도위, 낙랑남부도위의 위치 - 최초공개    "낙랑(樂浪)"에 대하여 누차 언급하는 것은 이 낙랑의 위치를 정확히 찾는 것이 바로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 강역을 찾는 지름길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한사군을 설치할 때 그 도읍인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을 낙랑군의 치소로 삼았기 때문에, 낙랑군의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도 그 위치에 대하여 논란이 많은 고조선(왕검조선)의 도읍 왕검성과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정확히 찾을 수 있고, 고조선(왕검조선)과 위만조선의 강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나머지 임둔군, 진번군, 현토군의 위치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전한서 ..

카테고리 없음 2009.04.07

윤여동설 - 진덕여왕은 당 태종을 짝사랑했었다?

윤여동설 - 진덕여왕은 당 태종을 짝사랑했었다?    신라 28대 진덕여왕의 이름은 승만이고, 출생시기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국반갈문왕[필자주 : 삼국유사 손보기본에는 國眞安葛文王이라 했다]이고 어머니는 월명부인[삼국유사에는 아니부인이라 했다]으로 기록되고 있다.    26대 진평왕[이름은 백정(白淨)이다]에게는 두 명의 형제가 더 있었는데, 바로 아래 동생은 백반(伯飯)이었고, 둘째 동생은 국반(國飯)이었다.  27대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딸이었고, 백반의 후손은 역사에 나타나지 않고, 28대 진덕여왕은 국반의 딸이었다. [진덕여왕의 세계도]                                   24대진흥왕                                    ..

카테고리 없음 2009.03.31

윤여동설 -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라?

윤여동설 -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라? 우리나라 사람 중 대부분은 가야가 경남 김해 부근에 위치했다고 인식하고, "임나" 하면 "임나가라(임나국)"와 "임나일본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임나일본부에 대하여 일본학자들은 고대의 왜국이 한반도 남쪽 가야지역으로 진출하여 그곳에 임나일본부라는 것을 설치하고 한반도 남부를 일정기간 통치했다고 주장하고, 우리 학자들은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삼국유사 기이 제1 오가야 조를 보면,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를 5가야로 기록하고 있는데, 수로왕의 금관가야까지 합하면 6가야가 된다. 그리고 일연이 살았던 고려시대의 본조사략이라는 사서에는 "태조 천복 5년(A.D.940) 경자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쳤다. 첫째는 ..

카테고리 없음 2009.03.30

윤여동설 - 무천(舞天)의 나라 예(濊)는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무천(舞天)의 나라 예(濊)는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 최초주장 후한서 예(後漢書 濊 : 동예)전 "예(濊)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서쪽은 낙랑까지이다. 예,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 땅이었다. 옛날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는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8조의 가르침(八條之敎)을 제정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하지 않게 되어 문을 닫지 않게 되었고, 부인들은 정조를 지키게 되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변두( 豆)를 사용한다. 그 후 40여 대를 지나 조선후 준에 이르러 스스로 왕을 칭했다. 한나라 초기 매우 혼란할 때 연나라·제나라·조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방으로 피난해간 사..

카테고리 없음 2009.03.26

윤여동설 - 미인들의 나라 동옥저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미인들의 나라 동옥저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후한서 동옥저(後漢書 東沃沮)전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까지이고, 북쪽은 읍루(挹婁)와 부여(夫餘), 남쪽은 예맥(濊貊)과 접했다. 그 땅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땅이 사방 천리의 절반쯤 된다.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잘 자라 밭에 씨를 뿌리면 농사가 잘된다. 읍락에는 우두머리(長帥)가 있다. 사람들의 성질은 정직하고, 강건하며, 용감하다. 창을 잘 다루어 보병전을 잘한다.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은 (고)구려와 유사하다. 장사지낼 때에는 큰 나무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장이나 되며, 한쪽 끝 부분을 열어놓아 문을 만든다. 새로 사람이 죽게되..

카테고리 없음 2009.03.20

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지는 선화공주가 지은 절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지는 선화공주가 지은 절이 아니다 - 최초주장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던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불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이내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다. 善花公主主隱 他密只稼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선화공주님은 남모르게 애인 만들어 놓고, 서동의 방..

카테고리 없음 2009.03.17

윤여동설 - 한반도 최초로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성된 덕흥리 고분

윤여동설 - 한반도 최초로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성된 덕흥리 고분 유주자사진의 묘 유주(幽州)라는 지역이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중국 산서성 대동 부근으로부터 북경 부근까지를 말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북한 평남 덕흥리에서 발견된 고분의 주인공이 바로 그 유주지역을 다스리던 유주자사 진이라는 사람이었고, 주인공의 모습과 13군 태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자사(刺史)는 지금의 도지사와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고, 태수(太守)는 군수쯤이 될 것인데, 그의 무덤 속에 13군 태수가 유주자사 진에게 업무를 보고하는 그림을 그려 놓았다는 것은 유주자사 진이 바로 그 유주 13군을 관할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고..

카테고리 없음 2009.03.06

윤여동설 - 백제 무령왕 금제왕관장식에 목련꽃 활짝 피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무령왕 금제왕관장식에 목련꽃이 활짝 피었다 - 최초주장 충남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화려한 것은 단연 금제왕관장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무령왕릉이 발굴된 지 수십년이 되었건만 금제왕관장식이 과연 무엇을 형상화 한 것인지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그것이 타오르는 불꽃을 형상화했다느니, 신령스런 영기(靈氣)문양이라느니, 연꽃이라느니 주장들이 제각각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아무리 보아도 나뭇가지에 꽃이 핀 모양을 형상화 한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조를 보면, "28년(A.D.261) 봄 정월 초하루날에 왕이 자주색으로 된 큰소매 달린 도포와 푸른 비단바지를 입고, 금꽃으로 장식한 오라관을..

카테고리 없음 2009.02.26

윤여동설 - 고구려 국내성과 요서 10성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 국내성과 요서 10성의 위치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6대 태조대왕 3년(A.D.55) 조를 보면, "봄 2월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를 방비토록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가 요서 지역까지 진출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10개나 되는 성을 쌓았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그 성을 쌓은 곳이 요서 지역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성의 이름이나 그 성들의 배치상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도록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를 보면, 조대기의 기록을 인용했다고 하면서 그 요서 10개성의 이름과 배치상태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기록을 보면, "조대기에 이르기를, 태조 융무 3년 요서에 10성을 쌓고 이로써 한(漢)의 10성에 대비하게 하였다. 1..

카테고리 없음 2009.02.22

윤여동설 - 신라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와 낙랑 그 의문의 접촉기록들 - 최초주장 낙랑은 신라 시조 혁거세거서간 30년(B.C.28)부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록을 보면,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침입했는데, 변방 백성들이 밤에 대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가 들에 있는 것을 보고 서로가 말하기를 '이 지방의 백성들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으니 가히 도덕이 있는 나라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몰래 군사로서 습격한다는 것은 도둑이나 다름없다. 부끄럽지 않은가? 하고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라는 이상한 기록인데, 삼국유사 낙랑국 조에는 "국사(國史)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혁거세 30년에 낙랑 사람들이 신라에 항복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동일한 시기에 대한 신라와 낙랑과의 관계를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

카테고리 없음 2009.02.15

윤여동설 - 고대 동이와 중국과의 국경은 태행산맥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대 동이와 중국과의 국경은 태행산맥 - 최초주장 맹자 초상화 지금 중국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황제헌원과 동이 환웅국(필자주 : 구려국이라고도 하고, 고구려라는 국호가 바로 이 구려에서 나왔을 것이라고도 한다)의 제왕이었다는 치우천왕이 서로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국운을 걸고 무려 10년 간이나 전투를 했다는 곳은 탁록인데, 지금의 북경 서남쪽 탁주시 부근을 말한다. 이때 두 민족이 탁록에서 국운을 걸고 다투었다는 것은 그곳이 두 나라의 국경지역이었고, 상호 공수의 요충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지금 요하 동쪽만이 우리의 옛 강역이었을 것으로 인식하고 있고, 순임금이나 우임금은 당연히 중국의 제왕이었을 뿐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

카테고리 없음 2009.02.09

윤여동설 - 천부경은 숫자생성의 원리를 설명한 것

윤여동설 - 천부경은 숫자생성의 원리를 설명한 것 中本衍運三三一盡一 天 天本萬三大天三本始 符 地心往四三二一天無 經 一本萬成合三積一始 一太來環六地十一一 終陽用五生二鉅地析 無昻變七七三無一三 終明不一八人궤二極 一人動妙九二化人無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십시오 현재 우리에게 전해진 천부경은 신라말 고운 최치원이 옛 신지의 전문(篆文)을 옛 비석에서 보고 이를 한문으로 번역하고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했다는 것인데, 이 천부경에 대한 해석이 사람마다 달라 우리는 지금 어느 것이 정확한 해석인지 알 수가 없다. 최고운이 원문과 함께 해석도 같이 전하였더라면 지금과 같은 사태는 오지 않았을 것인데, 오직 천부경 81자 만을 전하였으니 그의 공은 크지만 아쉬움이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카테고리 없음 2009.02.04

윤여동설 - 백제 왕후들의 성씨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왕후들의 성씨 - 최초주장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봉안기 : 백제왕후가 좌평 사탁적덕의 딸이라는 명문이 있다] 백제왕들의 성씨가 "부여(扶餘)"씨라는 것은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어 우리는 지금 그를 알고 있지만, 그 백제왕들이 과연 어느 성씨의 여인들을 왕후로 맞아들였는지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전북 익산 미륵사지서탑 해체과정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에 "我百濟王后佐平沙乇積德女(우리 백제왕후께서는 좌평 사탁적덕의 따님)"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에 이르러 백제(반도백제)왕후 중 한 사람의 성씨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삼국사기에서 백제(대륙백제) 왕후의 성씨에 대하여 추정해 볼 수 있는 기록은 지극히 단편적이지만 대체적으로 진(眞)씨와 해(解)씨..

카테고리 없음 2009.01.28

윤여동설 - 최리의 낙랑국은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최리의 낙랑국은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낙랑국(樂浪國)  전한(前漢) 때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응소(應邵)는 이것이 "고조선국(古朝鮮國)"이라 했다.  신당서(新唐書)의 주에는,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라고 했다.  국사(國史 : 삼국사기)에는,  "혁거세 30년에 낙랑 사람들이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 유리왕) 4년에 고구려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 :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은 대방(帶方: 북대방)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무휼왕(無恤王) 27년에 광호제(光虎帝 : 후한 광무제)가 사자를 보내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카테고리 없음 2009.01.23

윤여동설 - 이부란 소제 시원5년 이후의 낙랑군과 현토군을 말하는 것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유사 이부(二府) 조의 새로운 해석이부란 소제 시원 5년 이후의 낙랑군과 현토군을 말하는 것 - 최초주장 이부(二府) 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B.C.82) 기해년에 두 외부(外府)를 두었다. 이것은 조선(朝鮮)의 옛 땅인 평나(平那)와 현토군(玄토郡) 등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삼고, 임둔(臨屯)·낙랑(樂浪) 등 두 군(郡)의 땅에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둔 것을 말함이다."라고 했다. [내가 알기로는 전한서 조선전에는 진번·현토·임둔·낙랑 등 네 군郡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에는 평나(平那)가 있고 진번이 없으니 대개 한 지방을 두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다]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는 그 땅을 나누어 네 군을 ..

카테고리 없음 2009.01.16

윤여동설 - 한의 월지국(목지국)은 발해 북쪽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풍윤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의 월지국(목지국)은 발해 북쪽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풍윤부근 - 최초주장    마한(馬韓)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魏滿)이 조선(고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왕 준(準)은 궁인과 좌우근신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 한(韓)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고 했다."   삼국지 한전에는 위만의 성씨를 "위(衛)"씨로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 삼국유사에는 위(魏)나라를 인식했는지 "위(魏)"씨로 기록하고 있어 혼란스러운데 아마 삼국유사가 잘못일 것이다.   그리고 삼국지의 한전 원문에는 준왕이 새로 세운 나라를 "마한"이라고 하지 않고 "조선(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는 근신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한의 땅에 거주하면서 스스..

카테고리 없음 2009.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