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윤여동설 891

윤여동설 - 부여의 황금, 섭라의 백옥 보물찾기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부여의 황금, 섭라의 백옥 보물찾기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왕 13년(A.D.504) 조를 보면,  "여름 4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더니 위나라 세종이 우리 사신 예실불을 동당에서 접견했는데, 예실불이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누대에 걸쳐 온 정성을 다하여 토산물을 보내는 조공을 빠뜨리지 않았으나 다만 황금(黃金)은 부여에서 나오고, 가(珂: 백옥)는 섭라에서 나오는 것인데, 부여는 물길에게 빼앗겼고, 섭라는 백제가 병합해버렸으므로 금과 옥이 왕의 창고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위서 고구려전에도,   "정시(A.D.504-507) 중에 세종이 동당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예실불이 나아가 말하..

카테고리 없음 2008.12.24

윤여동설 - 대륙고려와 반도조선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대륙고려와 반도조선 - 최초주장      왕건의 고려는 대륙의 하북성이 중심이었고, 이성계의 조선은 한반도가 중심이었다.    윤여동설에 의한 환인환국, 환웅단국으로부터 고조선, 삼한, 삼국, 발해, 고려까지 우리 역사의 중심은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 북쪽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이라는 것이다.    환인환국의 중심강역은 하북성과 내몽골 적봉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칠로도산(七老圖山) 부근이고, 환웅단국의 중심강역은 칠로도산 동쪽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 부근이며, 고조선(왕검조선)의 도읍인 왕검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서 이때 고조선의 최대강역은 서쪽으로는 황하 북부 오르도스 지역까지, 동쪽으로는 요하까지, 남쪽으로는 발해와 황하하류를 지나 산동반도까지, 북쪽으로는..

카테고리 없음 2008.12.22

윤여동설 - 우리 고대사의 의문을 밝혀 줄 윤여동의 난하중심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우리 고대사의 의문을 밝혀 줄 윤여동의 난하중심설 - 최초주장 우리 고대사가 실제 이루어진 곳이 어디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모범답안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우리 고대 역사의 현장에 관한 한 아직 정설이 없고 가설만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가설이란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개인의 의견이라 정의할 수 있으므로 우리 고대사가 이루어진 역사의 현장은 아직 정확히 찾지 못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고대사의 현장이 과연 어디인가라는 질문에는 현격하게 다른 상반된 두 주장이 존재한다. 첫째는 한반도를 우리 역사의 중심지로 보고 해석하는 한반도중심설이 있고, 둘째는 발해 서북쪽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하는 그 부근 지역을 우리 고대사의 중심 강역으로 보는 난하중심설(윤여동설)이 있다. 한반..

카테고리 없음 2008.12.19

윤여동설 - 새로 옮긴 현토군의 치소는 하북성 장가구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기원전 75년(元鳳6년)에 새로 옮긴 현토군의 치소는 하북성 장가구 부근 - 최초공개 원봉(元封) 4년(B.C.107)에 설치된 초기 현토군의 위치는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이고, 원봉(元鳳) 6년(B.C.75)에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는 현토군 역시 아직도 어디를 말하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한반도 북한 평양을 낙랑군으로 인식한 조선시대 사람들은 초기 현토군이 함경도 함흥지역에 설치되었다가 요하 부근으로 옮겨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렇지만 옛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었고, 전한 낙랑군의 치소였던 곳이 한반도 부근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라면 현토군의 위치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된..

카테고리 없음 2008.12.17

윤여동설 - 초기 현토군과 낙랑동부도위와의 관계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초기 현토군과 낙랑동부도위와의 관계 - 최초공개 후한서 동옥저 전을 보면,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토군을 만들었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필자 주 : 구려의 오기이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 (후한) 광무제 때에 이르러 도위의 관직을 없애고 후에 모두 그 거수를 봉하여 옥저후로 삼았다. 그 땅이 작아 큰 나라 사이에 끼어 핍박을 받다가 마침내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옥저 땅에 초기 현토군의 치소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고, 후한서 예전에는, "원봉3년(B.C.108)에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임둔·현토·진번으로 나누었는데, 소제 시원 5년(B.C.82)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카테고리 없음 2008.12.15

윤여동설 - 후한 광무제가 설치한 후한낙랑군의 치소는 북경 동북쪽 하북성 흥륭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후한 광무제가 설치한 후한낙랑군의 치소는 북경 동북쪽 하북성 흥륭 부근 - 최초주장 미우나 고우나 우리 역사는 낙랑군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전개된다. 따라서 우리 역사를 정확히 해석하기 위해서는 낙랑군의 위치가 매우 중요한데, 삼국사기에 낙랑에 대한 기록은 서기 313년까지 나타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한 무제가 설치했던 전한낙랑군이 기원전 108년부터 서기 313년까지 무려 421년 간 쭉 이어졌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A.D.37)조를 보면,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고, 또 대무신왕 27년(A.D.44) 조를 보면, "한(漢)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빼앗..

카테고리 없음 2008.12.12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 최초공개 원봉 2년(B.C.109) 한나라는 섭하를 보내어 (조선의) 우거를 회유하였으나 끝까지 수긍하지 않고,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올 때 국경인 패수(필자 주 : 이때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국경이 패수일 수는 없고 살수이어야 맞다. 만약 패수일 경우 패수 동쪽에 바로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위치했었다는 말이 된다. 사실이 이러했다면 위만조선은 도읍을 동쪽으로 멀리 옮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인데, 위만조선은 멸망할 때까지 왕검성에 도읍하고 있었다)에 이르자 사람을 시켜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장을 죽이고 즉시 강을 건너 요새로 돌아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천자는 그것을 잘한 것으로 여겨 나..

카테고리 없음 2008.12.05

윤여동설 -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 최초주장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경에는 무엽산이라 했고, 또는 백악이라고도 하는데 백주에 있었다)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했는데, 고(요임금)와 같은 시대였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단군왕검은) 당고(당요) 즉위 50년 경인(당요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사실이 아닐 것이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고 조선(朝鮮)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궁홀산(일명 방홀산이라고도 한다)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했다. 그 나라는 1,500년 간 존..

카테고리 없음 2008.11.26

윤여동설 - 왕검조선의 건국과 멸망시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왕검조선의 건국과 멸망시기 - 최초주장   삼국유사 고조선(왕검조선 조를 보면,           "(단군왕검은) 당고(당요) 즉위 50년 경인(당요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사실이 아닐 것이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고 조선(朝鮮)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로 옮겼는데 궁홀산(일명 방홀산이라고도 한다)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했다. 그 나라는 1,500년 간 존속했다.  주 호왕(무왕) 즉위 기묘년(B.C.1122)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阿斯達)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다. 1,908세까지 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임금(제요도당씨)은 기..

카테고리 없음 2008.11.24

윤여동설 - 환국(환인국)과 단국(환웅국)의 중심강역은 지금의 어디였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환국(환인국)과 단국(환웅국)의 중심강역은 지금의 어디였을까? - 최초주장 [환인은 흑수백산의 땅에 환국을 세웠고, 환웅은 동남동녀 3천을 이끌고 태백산 동쪽에 신시를 세웠고, 다시 단군 왕검은 태백산 남쪽 왕검성에 도읍하고 고조선을 세웠다] 환인국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었고, 환웅이 3천의 무리를 이끌고 옮겨가 나라를 세웠다는 태백산(太白山)과 신시(神市)는 또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안함로의 삼성기를 보면, "어느날 동남동녀 800이 흑수(黑水)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환인은 또한 감군으로서...............뒤에 환웅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이 모이는 곳을 천평(天坪)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로 정했..

카테고리 없음 2008.11.17

윤여동설 - 한민족은 곰의 후예인가?

윤여동설 -  한민족은 곰의 후예인가?           이때 호랑이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신웅(神熊: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빌었다. 그리하여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했다.   이에 곰과 호랑이가 그것을 받아서 먹었다.   삼칠일 동안 조심했더니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고, 호랑이는 잘못하여 사람의 몸으로 변하지 못했다.   웅녀는 혼인할 사람이 없으므로 날마다 단수(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축원하였다. 이에 웅(환웅)이 잠깐 사람으로 변하여 혼인하였더니 곧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불렀다.       ..

카테고리 없음 2008.11.12

윤여동설 - 한국,중국,일본이 역사를 거짓말로 해석하는 이유(3) - 일본편

한국·중국·일본이 역사를 거짓말로 해석하는 이유(3) - 일본편 고대 역사를 착각하고 옛 땅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고 역사강역을 잃어버리고 있는데도 그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한국, 청나라 때의 강역을 고착화시켜 역사강역을 최대한 넓히려고 안달하는 음흉한 중국, 천황의 정통성 때문에 자신들의 대륙역사 강역을 주장하지 못하고 진퇴양난에 빠진 일본. 지금 이 세 나라는 고대 역사의 해석을 모두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는데, 중국이나 일본은 그들이 목적하는 바가 있으나 한국은 아무 이득도, 명분도 없는 일에 멋도 모르고 덩달아 춤을 추고 있고, 옛 강역을 스스로 잃어버리고 있으니 정말 바보 같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천황의 정통성 때문에 고대역사를 왜곡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일본 고대의 왜국은 일본열도가 아닌 지..

카테고리 없음 2008.10.31

윤여동설 - 한국,중국,일본이 역사를 거짓말로 해석하는 이유(1) - 한국편

한국·중국·일본이 역사를 거짓말로 해석하는 이유(1) - 한국편 고대 역사를 착각하고 옛 땅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고 역사강역을 잃어버리고 있는데도 그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한국, 청나라 때의 강역을 고착화시켜 역사강역을 최대한 넓히려고 안달하는 음흉한 중국, 천황의 정통성 때문에 자신들의 대륙역사 강역을 주장하지 못하고 진퇴양난에 빠진 일본. 지금 이 세 나라는 고대 역사의 해석을 모두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는데, 중국이나 일본은 그들이 목적하는 바가 있으나 한국은 아무 이득도, 명분도 없는 일에 멋도 모르고 덩달아 춤을 추고 있고, 옛 강역을 스스로 잃어버리고 있으니 정말 바보 같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역사를 착각하고 있는 바보 같은 한국 우리 역사의 상고시대로부터 고대 역사의 중심지는 한반..

카테고리 없음 2008.10.27

윤여동설 - 한반도 역사의 진실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에서는 어떠한 고대역사가 전개되었을까? - 최초주장 필자는 지금까지 고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 역사의 중심은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 북쪽 중국 하북성에 있는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 지역이라 하였고, 한반도는 이성계의 조선이 대륙에서 건국된 후 바로 도읍을 한반도의 한양으로 옮김으로서 비로소 우리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려 시대로부터 그 이전 한반도에는 어떠한 역사가 펼쳐졌던 것일까? 한반도에도 구석기 유물로부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고, 소량이지만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유물들도 출토되고 있다. 다만 구석기 시대에 대해서는 너무도 오랜 옛날의 일이라 언급하지 않겠고, 고조선시대쯤부터는 많은 수는 아니라 하더라도 한반도 남쪽에서도 요하..

카테고리 없음 2008.10.24

윤여동설 - 고구려왕들의 시호와 의미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왕들의 시호와 의미 - 최초공개 시조 추모왕(鄒牟王) "추(鄒)"는 산동반도 부근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추 나라라고 하는 국가를 나타내는 추자이고, "모(牟)"는 탐하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글자인데, 주몽은 북부여의 후예로서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다가 고구려의 건국시조가 된 사람이다. 남의 나라를 빼앗아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가 시호에 담겨진 것이 아닌가 싶다. 사고전서 경부 사서석지3 속권 하에는 "맹자는 추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때 주나라였고, 주나라에 동이의 풍속이 섞여있으니 맹자가 이(夷)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주몽의 시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의 시호인지는 의..

카테고리 없음 2008.10.22

윤여동설 - 유리왕의 막내아들 여진(如津) 왕자는 비류수 강물에 빠져 죽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유리왕의 막내아들 여진(如津) 왕자는 비류수 강물에 빠져 죽었다 - 최초주장 연속극 "바람의 나라"가 점점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역사적 사실이 아닌 부분이 많지만 재미를 위해 설정한 것이려니 이해하고 역사를 알고 새겨가면서 볼 수밖에 없다. 연속극에서는 무휼이 여진왕자를 인질로 잡고 해명태자를 죽게 한 유리왕을 유인하여 죽이려 하다가 유리왕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원래 유리왕은 40세에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와서 주몽왕(추모왕)의 태자로 봉해졌다가 아버지인 주몽왕이 죽자 고구려의 2대 왕위에 올랐다. 동부여에 있을 때 결혼을 했었다는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졸본으로 도망쳐 올 때까지 노총각 신세였던 듯 하다. 그리하여 그는 왕위에 오른 ..

카테고리 없음 2008.10.16

윤여동설 -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금성)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가 확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금성)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가 확실 - 최초주장 삼국유사 기이 제1 진한 조에는, "신라 전성기에는 서울(서라벌)에 178,936호, 1,360방, 55개 리(里), 35개의 금입택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호당 평균 5명의 식구가 있었다고 가정할 때 당시 신라의 도읍 서라벌의 인구가 894,680명(178,936호X5명) 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어느 사람은 지금도 경주시내와 주변 면소재지까지를 포함한 경주시에 30만(275,659명 : 2008년 6월 30일 기준)이 안 되는 인구가 살고 있는데, 어떻게 1천여 년 전에 지금 경상북도 경주에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나타내기도 하고, 어느 사..

카테고리 없음 2008.10.16

윤여동설 -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는 하북성 당산시 난주(난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는 하북성 당산시 난주(난현) - 최초주장 백제26대 성왕은 서기 538년 봄에 이르러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는 국호까지도 남부여(南扶餘)로 바꾼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는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537년까지로 끝나고, 538년부터는 남부여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인데, "남부여"라는 국호는 "옛 졸본부여의 영광을 남쪽 땅에 재현하겠다"는 명분을 세워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길 때만 잠깐 언급했을 뿐 실제 국호로 사용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백제의 성왕은 왜 이때에 이르러 사비로 도읍을 옮겨야 했던 것일까? 학자들은 그 이유를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 때문에 도읍인 웅진이 위험하다고 보고 더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과연 그것이 맞는 말일..

카테고리 없음 2008.10.12

윤여동자료 - 고운 최치원의 토황소격문(격황소서) 번역문

윤여동자료 - 천하명문으로 알려진 최치원의 토황소격문(檄黃巢書) [고운 최치원선생 초상] 신라 헌강왕(재위: 875-886) 때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중국에 유학을 가서 과거에 급제해 벼슬에 나아가 있던 신라 사람 최치원은 그 토벌총사령관 고변의 휘하에 종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변은 이때 최치원으로 하여금 황소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격문을 짓도록 하였는데, 이 격문이 바로 천하명문으로 알려진 "토황소격문(檄黃巢書)"이다. 황소가 이 격문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다는 일화가 전할만큼 뛰어난 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학창시절 토황소격문이 신라 사람 고운 최치원이 지었고, 천하 명문이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정말로 그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잘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의 시문집..

카테고리 없음 2008.10.09

윤여동설 - 백제 문주왕이 옮긴 도읍 웅진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노룡현을 말하는 것이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의 문주왕이 옮긴 도읍 웅진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노룡현을 말하는 것이다 - 최초공개 [백제 웅진성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노룡 영평부성도] [서문] [남문] [진황도 노룡현 영평부성터 내의 시가지(중앙)와 서쪽을 지나는 청룡하] 고구려의 장수왕은 475년(백제 21대 개로왕 21년)에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도읍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도망치는 개로왕을 잡아죽이게 된다. 그리하여 개로왕의 동복동생인 문주왕이 왕위에 올라 급히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는데, 우리는 이 백제의 도읍 웅진을 충남 공주라고 알고 있다. ☆ 삼국사기에는 문주왕을 개로왕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은 개로왕의 동복동생이다. 개로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문주왕이 왕위를 이었다. 우..

카테고리 없음 2008.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