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윤여동설 891

윤여동설 - 요동군, 요서군, 상곡군, 우북평군, 어양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전한서지리지가 말해주는 상곡군과 어양군, 우북평군의 위치 - 최초공개 고조선 때 연나라 진개의 침공을 받고 서쪽 변경 1천여리의 땅을 빼앗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연나라에서는 그 땅에 요동군, 요서군, 어양군, 우북평군, 상곡군을 설치하고 ,조양에서 양평까지 장성(연장성이라 합니다)을 쌓아 그 땅을 영구히 연나라 땅으로 만들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 고구려는 그 땅을 탈환하려 하였고, 중국 세력들은 그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펼치게 되고, 한 때는 백제도 뛰어들어 요서지역까지 진출하여 북위와 전쟁을 하여 대승하기도 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5대 모본왕 2년(A.D.49) 조를 보면,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우북평이라..

카테고리 없음 2008.04.07

윤여동설 - 보덕왕 안승이 살았던 금마저(金馬渚)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보덕왕 안승이 살았던 금마저(金馬渚)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공개 문무왕 10년 서기 670년 6월 고구려 수림성 사람 모잠 대형이 668년에 멸망한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신라로 오다가 고구려 귀족인 안승을 만나 백제의 옛 도읍인 한성에서 안승을 왕위에 올린 후 신라에 망명을 요청해 오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안승의 신분에 대하여 고구려의 대신 연정토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문무왕이 안승에게 내린 책명문에 "공의 태조 중모왕은 덕을 북산에 쌓고, 공을 남쪽 바다에 세워 위풍이 청구에 떨쳤고, 어진 교화는 현토를 덮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안승의 신분은 고구려의 왕족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고, 한성이란 한반도의 서울을 말하..

카테고리 없음 2008.04.03

윤여동설 - 한반도 김제 벽골제는 신라가 쌓은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 전북 김제 벽골제는 신라가 쌓은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16대 흘해이사금 21년(A.D.330) 조를 보면, "벽골지(碧骨池)를 처음 만들었는데 그 둑의 길이가 1,800보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원성왕 6년(A.D.790) 조를 보면, "봄 정월 벽골제(벽골지의 뚝)를 증축하는데, 전주 등 일곱 주의 사람을 징발하여 공사를 일으켰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 이 기록을 한반도 전북 김제 부량면에 있는 옛 저수지 뚝에 비정해 역사를 해석함으로써 그 뚝을 김제벽골제라 부르며, 이 저수지 뚝이 신라 흘해이사금 때 쌓은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기 위해서는 신라 초기인 서기 330년에 전북 김제 지역이 신라 땅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한반도..

카테고리 없음 2008.04.02

윤여동설 - 고려의 강동 6주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의 강동 6주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서기 993년 고려 성종 12년에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으로서 고려를 침공한다. 앞서 왕건이 거란에서 보낸 낙타를 만부교에서 굶어 죽게 했고, 그 후 다시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 국교 맺기를 요청했으나 고려는 아예 상대를 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고려가 거란을 신의 없고 믿을 수 없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란이 침공해오자 고려에서는 박양유를 상군사로 삼고, 서희를 중군사로,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북서쪽 국경에 주둔하고 거란을 방어하게 하고, 왕 성종도 개경에서 서경으로 왔다가 안북부로 나아가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거란이 봉산군을 쳐서 고려의 선봉군사인 윤서안 등이 사로잡히게 된다. 성종이 서희에게 명하여 봉산군을 구..

카테고리 없음 2008.04.01

윤여동설 - 당나라가 신라에게 준 패강이남(패수이남) 땅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당나라가 신라에게 준 패강이남(패수이남) 땅은 한반도 대동강 남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최초주장 우리는 지금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없애고 삼국을 통일했다하여 그 이후 시기를 통일신라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신라가 옛 고구려 땅을 모두 차지하지 못하고 패수 이남의 극히 일부분만을 차지했기 때문에 삼국통일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으므로 달리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신라가 패수 이북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33대 성덕왕 34년(A.D.735) 조의, "정월 김의충을 당나라에 보내 신년을 축하했다. 2월에 부사 김영이 당나라에서 죽으니 광록소경을 추증했다. 의충이 돌아올 때 황제(당 현종)가 조칙으로 패강 남쪽 땅을 (신라에게) 주었다" 라는..

카테고리 없음 2008.03.31

윤여동설 - 삼국사기는 왜 최리를 낙랑왕이라 기록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사기는 왜 최리를 낙랑왕이라 기록했을까? - 최초주장 [청나라 때의 피서산장(열하행궁) 전경 그림인데 성 내부의 면적이 170만평이나 되는 곳으로서 이곳이 바로 고조선의 왕검성,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옛날 고조선의 단군들과 고구려의 왕들은 이렇듯 제왕이 살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멋진 곳에서 살았다.] 우리 삼국 역사를 논할 때 항상 먼저 언급되어야 하는 것이 곧 "낙랑(樂浪)"인데, 이는 낙랑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는 우리의 고대사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낙랑의 어원은 잘 알 수 없으나 "즐거울락(樂) 물결랑(浪)" 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위치가 바다(혹은 큰 강)를 끼고 있는 곳으로서 큰 파도가 치는 것이 장관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이게 되었을..

카테고리 없음 2008.03.30

윤여동설 - 김흠돌의 난은 왜 일어났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김흠돌의 난은 왜 일어났을까? - 최초주장 서기 681년 신라 31대 신문왕이 왕위에 오르자 소판 김흠돌과 파진찬 흥원 그리고 대아찬 진공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잡혀 죽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앞서 김유신의 누이인 정희는 나물왕의 후예인 달복과 혼인하여 흠돌과 흠운이라는 두 아들을 낳는다. 따라서 이들은 김유신의 조카이며, 태종무열왕비 문명왕후 문희의 조카이기도 하고, 또 흠돌은 김유신의 딸인 진광과 혼인했기 때문에 김유신의 사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흠돌은 본래 사람됨이 사악하였는데, 파진찬 선품의 딸인 자의가 태종무열왕의 장자로서 태자로 봉해져 있던 법민과 혼인하기 전에, 흠돌이 먼저 얼굴이 예쁜 자의를 보고는 홀딱 반하여 그녀를 강제로 ..

카테고리 없음 2008.03.30

윤여동설 - 한사군의 원래위치와 2군 1도위로의 변화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사군의 원래위치와 2군 1도위로의 변화도 - 최초주장 전한서의 원문과 해석문을 함께 올리는 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 상식과 같이 옛날 한나라의 현토군이 한반도의 함경도 지방에 위치했는지, 아니면 필자의 주장과 같이 (원래 내몽골 옹우특기 부근에 있다가) 북경(옛 요동군이었다) 서북쪽 부근으로 옮겼는지, 낙랑군이 북한 평양 부근에 설치되었는지 아니면 필자의 주장과 같이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설치되었는지를 확인해 보라는 의미이니, 지도를 펴놓고 지명을 짚어가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현토군(玄토郡) (전한) 무제 원봉 4년(B.C.107)에 설치했다. 고구려를 왕망이 하구려라 했다. 유주에 속한다.[응소는 말하기를 옛 진번조선호(고)국이라 했다] 호수는 45,006호이고, 인구는 221..

카테고리 없음 2008.03.28

윤여동설 - 요사지리지가 말해주는 요 동경요양부의 위치를 찾아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요사지리지가 말해주는 요 동경요양부의 위치를 찾아라 - 최초주장 우리는 지금 요나라의 동경요양부를 압록강 서북쪽 중국 요녕성 요양(遼陽)으로 비정하여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사서들은 말해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을 잠시 접어두고 객관적 입장에서 아래 요사의 기록에 따라 요 동경의 위치를 찾아보자. 요사 권38, 지제8, 지리지 2 동경도(東京道)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다.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석방하여 감옥에서 풀어주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고, (무왕은) 이로 인하여 그를 (조선에) 봉했다. (기자가) 범금팔조(犯禁八條)로서 백성들을 교화하니, (백성들이) 예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양잠으로 부유해져 대..

카테고리 없음 2008.03.26

윤여동설 - 백제 책계왕비 보과는 공손씨였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책계왕비 보과는 공손씨였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건국설화를 보면,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자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매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로써 아내를 삼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 동명왕의 후손인 구태라는 사람이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과 혼인을 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 동명이란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을 말하는 것이고, 구태는 백제 4대 개루왕의 차자로서 초고왕의 동생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대방 옛 땅에 백제를 세운 인물이 아니라 백..

카테고리 없음 2008.03.26

윤여동설 - 새롭게 비정하는 백제의 도읍과 그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새롭게 비정하는 백제의 도읍과 그 위치 - 최초주장 온조백제는 기원전 18년 건국하여 위례성에 도읍했고, 기원전 5년 남한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서기 371년에 한성으로 다시 옮겼고, 475년에 웅진으로 옮기고, 538년에 도읍을 사비로 또 옮겼는데, 결국 이곳 사비에서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의자왕이 서기 660년 7월 18일에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도읍명 왕대 도읍이전년도 도읍기간 비고 위례성 온조왕 B.C.18 13년 건국지 남한성 온조왕 B.C.5 376년 비류백제통합후 한성 근초고왕 A.D.371 104년 요서진출후 웅진 문주왕 A.D.475 63년 한성함락당한후 사비 성왕 A.D.538 - 660 122년 국세회복을 위해 그런데 후한서 한(韓)전을 보..

카테고리 없음 2008.03.23

윤여동설 - 신라 시조 혁거세거서간의 일생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 시조 혁거세거서간의 일생 - 최초주장 신라시조 혁거세거서간의 원래 성씨는 알 수 없고,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루에 진한 서라벌 동쪽 양산 남쪽 나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이나 신분은 전해지지 않았고, 어머니는 동부여의 공주 파소(사소라고도 한다)이다. ☆ 혁거세의 출생년도가 기원전 69년이므로 그 어머니 파소(사소)가 18세쯤 혁거세를 입태했다고 가정하면 그녀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87년이 되고, 그녀가 진한으로 와서 혁거세를 낳은 기원전 69년에 그녀의 신분이 부여제실의 딸이라고 했으므로 동부여 해부루왕의 공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라 시조 혁거세거서간은 동부여 건국시조 해부루왕의 외손자가 된다. 기원전 86년 동명왕이 이끄는 졸본부여가 북부여를 침공하여 북부여 4대 왕이었..

카테고리 없음 2008.03.21

윤여동설 - 백제 시조 온조왕의 일생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시조 온조왕의 일생 - 최초주장 백제시조 온조왕의 성은 부여씨이고, 기원전 46-45년경 졸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여우태이고, 어머니는 연소서노이다. ☆ 우태는 동명왕의 작은 아들의 아들 즉 손자로 보이고,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는 기원전 66년에 출생했는데, 18세인 기원전 49년에 혼인하여 첫아들을 낳았다면 장자인 비류는 기원전 49-48년 생이 되고, 2-3년 뒤에 다시 둘째 아들을 낳았다면 온조는 기원전 46-45년 생이 된다고 할 수 있는데, 혹시 이들 형제가 쌍둥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만약 쌍둥이라면 둘 다 기원전 49-48년생일 수도 있다.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의 이름은 부여두막으로서 기원전 108년에 졸본부여를 세우고 왕위에 올라 기원전 86년에 북부여를 멸망..

카테고리 없음 2008.03.20

윤여동설 - 고구려 시조 주몽왕(추모왕)의 일생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시조 주몽왕(추모왕)의 일생 - 최초주장 고구려 시조 주몽왕(추모왕)의 성은 해씨이고, 기원전 79년 5월 5일 동부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해불리지이고, 어머니는 유화이다. ☆ 주몽은 북부여 해모수의 고손자로서, 증조할아버지는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해진이고, 할아버지의 이름은 실전 되었고, 아버지의 이름은 해불리지이다. 어머니는 하백의 딸 유화라고 전해졌는데, 하백이란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어부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몽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은 어부의 딸이었다. 북부여는 고조선 말기인 기원전 239년에 해모수에 의해 건국되어, 7년 동안 주변국을 통합한 후 기원전 232년에 이르러 천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하여 왕위가 2대 해모수리왕, 3대 해해사왕, 4대 해우..

카테고리 없음 2008.03.20

윤여동설 -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서 건국되지 않았다(2)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신라는 한반도에서 건국되지 않았다(2) - 최초주장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동쪽에 (신라가 있고, 서쪽에)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했고,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있고, 남쪽에 가야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고, 마침 경주에 신라의 흔적들이 많고, 공주·부여에는 백제의 흔적들이 많으며, 북한 평양에는 고구려의 흔적들이 많이 있으므로 우리는 삼국사기 기록을 별 의심없이 한반도에 적용해 삼국의 위치를 한반도로 비정해 삼국사기의 모든 기록을 해석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북한 평양을 낙랑이라 하게 되었고, 황해도를 대방이라 했으며, 경상남도 지역을 가야라고 하게 되었고, 강원도를 예라고 했으며, 두만강 부근과 연해주를숙신이요 말갈이요, 여진이라고 했던 ..

카테고리 없음 2008.03.19

윤여동설 -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서 건국되지 않았다(1)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 · 신라는 한반도에서 건국되지 않았다(1) - 최초주장 우리는 백제의 건국지 위례성이 지금의 서울이라 하고, 미추홀을 인천이라 하며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금성)이 경주라고 하면서 삼국사기 기록 속의 백제, 신라 역사를 해석하려 한다. 그리하여 비류와 온조가 올랐다는 한산을 서울의 북한산 또는 북악산이라 하고, 문주왕이 옮긴 도읍 웅진을 충남 공주라 하며, 계백장군이 신라군을 막다 전사한 황산이 충남 연산 부근이라 하며,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를 충남 부여라 한다. 그리하여 웅천을 금강이라 하고, 백강도 부여를 지날 때의 금강이라 하며, 기벌포와 웅진구를 금강 하구 부근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서울 부근에서 백제 위례성의 확실한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인천부근에서 미추홀의 확실한 흔..

카테고리 없음 2008.03.18

윤여동설 - 태조대왕을 알면 고구려의 초기역사가 보인다(2)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태조대왕을 알면 고구려의 초기역사가 보인다(2) - 최초주장 고구려의 왕권교체 - 연노부(소노부)와 계루부 고구려 705년 역사에서 왕위 계승에 있어 성씨가 바뀐 시기로 추정해 볼 수 있는 때는 해씨인 모본왕에서 고씨인 태조대왕으로 왕위가 이어지는 시기 밖에는 없다. 따라서 모본왕 이전은 해씨였을 것이고, 태조대왕 이후는 고씨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삼국사기에도 5대 모본왕을 해우 또는 해애루로 기록하고 있고, 4대 민중왕을 해색주, 3대 대무신왕을 대해주류왕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여 그의 성명이 해주류였음을 확인해 볼 수 있고, 또 유리왕은 그 아버지 주몽의 원래 성씨가 해씨였으므로 그 아들인 유리왕 역시 해씨인 것이다. ☆ 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시조 해모수의 고손자이므로 당연히 그의 원래 ..

카테고리 없음 2008.03.16

윤여동설 - 태조대왕을 알면 고구려의 초기 역사가 보인다(1)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태조대왕을 알면 고구려의 초기역사가 보인다(1) - 최초주장 고구려 6대 태조대왕 궁은 고구려의 초기 역사를 밝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재사라는 인물은 유리왕의 어떻게 된 아들이고, 그의 시호를 왜 건국시조에게나 붙일 수 있는 태조왕(太祖王) 혹은 국조왕(國祖王)이라 했는지, 고구려 왕실의 성씨가 원래의 성씨였던 해씨에서 왜 고씨로 바뀌게 되었는지, 후한서나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가 "본래 소노부(연노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미약해져 계루부에서 왕위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무슨 의미인지 아직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또한 위서 고구려전의 "옛날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부인이 임신을 하였다. 주몽이 도망친 후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여해라 하였다...

카테고리 없음 2008.03.14

윤여동설 - 스키타이식 금관이 말해주는 한반도 고대사의 의문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스키타이식 금관이 말해주는 한반도 고대사의 의문 - 최초주장 [위 : 사마르티아 금관] [위 : 아프카니스탄 출토 금관] [위 : 한반도 고령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금관] [위 : 한반도 경주 황남대총 출토금관] 한반도 경주 부근의 고분들에서 출토된 금관들은 그 형태가 아름답기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데,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황남대총, 천마총 등에서 출토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러한 멋진 금관을 쓴 신라왕들의 모습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기도 한다. 그런데 신라금관, 가야금관과 비슷한 형태를 가졌으며, 시기적으로 앞서는 금관이 중앙아시아 흑해연안에서도 발굴되어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한다. 어떻게 그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출토된 금관의 형태와 그곳으로부터 수만리나 떨어진 한반도 남쪽..

카테고리 없음 2008.03.12

윤여동설 - 내몽골 오르도스형 동복(청동솥)이 왜 한반도 김해에서 발굴되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내몽골 오르도스형 동복(청동솥)이 왜 한반도 김해에서 발굴되었을까? - 최초주장 오르도스란 지금의 내몽골 악이다사(鄂爾多斯)를 말하는 것으로서 섬서성 북쪽에 바로 위치하는데, 그 부근에서 출토된 동복과 동일한 형태의 동복(청동솥)이 한반도 김해에서도 출토되었고, 경주에서는 기마인물형토기가 발굴되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따라서 오르도스 지역과 한반도 남쪽 지역 사이에 문화적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한반도 김해에서부터 무려 만리쯤이나 멀리 떨어져 있고, 대륙의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그곳의 유물과 거의 똑같은 동복(청동솥)이 한반도 남쪽에서 출토될 수 있었던 것일까? ☆ 형태가 같으므로 거의 동일 시기의 유물이라 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어느 사람..

카테고리 없음 2008.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