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윤여동설 901

윤여동설 - 신라에서 “군주(軍主)”라는 명칭은 진짜 언제부터 사용했던 것일까?

윤여동설 - 신라에서 “군주(軍主)”라는 명칭은 진짜 언제부터 사용했던 것일까? 삼국사기 신라본기 9대 벌휴이사금 2년(A.D.185) 조를 보면,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임명하여 좌․우 군주(軍主)로 삼아 소문국을 쳤다. ”군주”라는 명칭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라고 ..

카테고리 없음 2016.01.15

윤여동설 - 당 태종이 안시성 동남쪽 모퉁이에 쌓았던 토산(흙산)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당 태종이 안시성 동남쪽 모퉁이에 쌓았던 토산(흙산)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서기 645년 당 태종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의 일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조의 기록을 보면, “.........강하왕 도종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안시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토산(흙산)을 쌓고 안시성으로 점점 가까워졌다. 성 안에서도 성을 더욱 높여 방어를 굳게 하고 군사들이 교대하면서 하루에 6,7회씩 싸웠다. 당나라 군사의 돌격차와 기계포의 돌이 성벽을 허물었으나 성안에서 그때마다 목책을 세워서 부서진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다쳤는데 당 태종이 몸소 침을 놓아 주었다. 밤낮을 쉬지않고 토산(흙산)을 쌓아 무릇 60일이 걸렸으며 품이 50만이나 들었다. 토산(흙산) 꼭대기가 성..

카테고리 없음 2016.01.10

윤여동설 - 우리 역사해석의 핵심은 고대의 요동군(遼東郡)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우리 역사해석의 핵심은 고대의 요동군(遼東郡) 찾기 - 최초주장 [위 기주협우갈석도 상 어양군, 우북평군, 상곡군은 그 위치가 잘못 배치되어 있다] 우리의 고대 역사는 요동군(遼東郡)이 어디였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지게 된다. 요동군의 위치를 올바르게 찾는 것이 바로 우리 역사해석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하고 있었고, 고구려의 졸본,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과 백제(대륙백제)의 위례성, 미추홀, 한성, 남한성도 그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신라, 가야는 백제의 동쪽 또는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삼한인 마한, 진한, 변한도 그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위만조선도 그 부근에 있었고, 한사군도 그 부근에 있었다. 옛날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카테고리 없음 2016.01.03

윤여동설 - 발해의 홀한하(忽汗河)는 지금의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또는 사간목륜하(査干木倫河)일 가능성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발해의 홀한하는 지금의 시라무렌하 또는 사간무렌하일 가능성 - 최초주장 신당서 북적전 흑수말갈조를 보면, “..........잘 알려진 것이 속말부로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태백산에 이른다. 도태산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에 접했다. 속말수에 의지하여 사는데 이 강의 수원은 (태백)산 서쪽에서 흘러나와 북쪽으로 흘러 타루하(它漏河)로 들어간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 북적전 발해전을 보면, “만세 통천(A.D.696-697) 중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홰(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남은 무리와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북쪽을 거점으로 하여 오루하(奧婁河)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아 수비했다”라고 기록되어 ..

카테고리 없음 2015.12.20

윤여동설 - 신라 최초의 소경 아시촌(阿尸村)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신라 최초의 소경 아시촌(阿尸村) 찾기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22대 지증왕 15년(A.D.514) 조를 보면,   “봄 정월에 소경을 아시촌(阿尸村)에 설치하고, 가을 7월에 6부와 남쪽지방 사람들로 그곳을 채웠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신라 최초로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을 강역의 북쪽에 설치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런데 이 아시촌소경에 관한 기록은 이후에 전혀 언급되지 않고, 후대에 5소경(중원소경, 북원소경, 금관소경, 서원소경, 남원소경)을 설치할 때에도 일체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아시촌소경이 구체적으로 신라 땅 어디에 설치되었고, 언제까지 존속되었으며, 무슨 이유로 그 이후의 기록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 신증동국여지승..

카테고리 없음 2015.12.12

윤여동설 - 부여씨와 해씨, 고씨의 패권경쟁이 곧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부여씨와 해씨, 고씨의 패권경쟁이 곧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 - 최초주장 부여는 원래 단군왕검의 넷째아들 부여에게 주어진 영지로부터 유래했으므로 국호를 부여라 했고, 고조선의 서쪽지역에 위치했다. 원래 부여왕실의 성씨는 부여씨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세월이 흐르자 부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해씨인 해모수가 부여의 왕위를 찬탈하게 되자 그에 반발한 부여씨 동명왕이 다시 왕위를 제자리로 돌려놓게 되고, 패한 해씨들은 북쪽으로 도망쳐 예를 밀어내고 다시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동부여라 한다. ☆ 동부여에게 그 땅을 빼앗긴 예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임둔을 밀어내고 다시 그 땅에 예(동예)를 건설하는데, 이때 밀려난 임둔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혹시 이들이 베링..

카테고리 없음 2015.12.04

윤여동설 - 백제초기 왕위계승의 비밀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초기 왕위계승의 비밀찾기 - 최초주장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 ..................................|............................. ↓ ↓ 2대 부여무서왕 ?(실명) ↓부마(사위) ↓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왕(추모왕) 부여우태 = 소서노 (B.C.66년생) ......................|.................... ↓ ↓ ↓ 유리왕 비류 백제 건국시조 온조왕 ☆ 온조왕은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의 후예이고, 주몽왕(추모왕)은 북부여 건국시조 천제 해모수의 후예로서 서로 혈통이 다르다. 백제시조 온조왕의 어머니 소서노는 기원전 66년생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20세쯤에 장자인 비류를 낳았다면 비류는 기원전 47년생이 되고, 2년..

카테고리 없음 2015.11.01

윤여동설 - 제왕운기는 왜 백제에 34왕이 있었다고 기록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제왕운기는 왜 백제에 34왕이 있었다고 기록했을까? - 최초주장 이승휴의 제왕운기 백제기를 보면, “......소정방에게 명하여 사비로 진격해서 수륙으로 비처럼 시석을 퍼부었네. 수많은 궁녀들은 청류에 투신하고 낙화암만 대왕포에 우뚝 솟아있네. 돌아보니 678년에 34왕이 천복을 누리었네” 라고 노래하고 있다. 제왕운기는 고려 충열왕 13년(A.D.1287)에 당시 64세였던 이승휴(李承休)가 삼척 두타산에 은거하며 저술한 서사시로서 충렬왕에게 바쳐졌던 글인데, 내용 중 우리의 상식과 다른 부분들이 눈에 띈다. 그 중에서 우리의 역사상식으로는,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온조왕이 나라를 세워 서기 660년 31대 의자왕 때 이르러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멸망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백제가..

카테고리 없음 2015.10.25

윤여동설 -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신라왕자 김수충(金守忠)의 후손이 아닐까?

윤여동설 -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신라왕자 김수충(金守忠)의 후손이 아닐까? [사계 김장생 선생 묘비 : 유명조선국 가의대부 형조참판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시문원공 사계 김선생지묘] 신라의 왕자 신분이라고 역사서에 확실하게 기록이 전하나 그 후의 행적이 묘연한 신라왕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김수충(金守忠)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33대 성덕왕 3년(A.D.704) 조를 보면, “여름5월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를 보면 이 왕비는 배소왕후이고 시호가 엄정왕후(嚴貞王后)였다. 그리고 13년(A.D.714) 조를 보면, “2월 왕자 김수충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 하게하니 당나라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

카테고리 없음 2015.10.03

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가 정말 대방고지(帶方故地)였고, 건국시조는 구태(仇台)였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가 정말 대방고지(帶方故地)였고, 건국시조는 구태(仇台)였을까? - 최초주장    주서 백제전을 보면,   “백제는 그 선조가 대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비로소 대방 땅에 나라를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수서 백제전에는,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비로소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북사 백제전에도,   “동명의 후손에 구태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비로소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을 구태에..

카테고리 없음 2015.09.19

윤여동설 - 백제 의자왕의 아들들 출생순서는?

윤여동설 - 백제 의자왕의 아들들 출생순서는?                                     의자왕   ....................................|..............................................   |태자           |차자           |왜국볼모     |태자          |5남                         |서자 부여효    부여태      부여풍       부여융     부여연              부여궁                                         (웅진도독 대방군왕)                   ......................................

카테고리 없음 2015.09.11

윤여동설 - 백제 장군 녜식(녜식진), 녜군 형제는 매국노일까?

윤여동설 - 백제 장군 녜식(녜식진), 녜군 형제는 매국노일까? 660년 7월 13일 밤 백제의 도읍 사비성이 함락직전에 이르자 백제의 의자왕은 태자 효와 측근자들을 거느리고 사비성을 빠져나와 북쪽에 위치한 옛 도읍 웅진성으로 도망쳐갔다. 그러자 사비성은 곧 함락되었고, 왕자 태, 융, 연 등이 항복하게 된다. 그리고 18일에 이르러서는 웅진성으로 갔던 의자왕도 태자 효와 장군들을 거느리고 다시 사비성으로 돌아와서 항복하게 된다. 이 때의 상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18일에 의자가 태자와 웅진방 령군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구당서 권83 열전제33 소정방열전에는, “其大將禰植又將義慈來降(그 대장 녜식과 장군들이 의자와 (함께) 와서 항복하였다)”라고 기록..

카테고리 없음 2015.09.06

윤여동설 - 대당고김씨부인(大唐故金氏夫人)은 재당신라인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대당고김씨부인(大唐故金氏夫人)은 재당신라인이 아니다 - 최초주장 어느 교수라는 사람이 1954년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동쪽 교외 곽가탄(郭家灘)에서 출토되었다는 이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의 기록을 인용하여 이 김씨부인이 재당신라인이었다고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일반인들은 그 주장이 사실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필자가 그 묘지명을 아무리 세세히 살펴보아도 이 김씨부인이 재당신라인(필자주 : 당나라에 가서 살고 있던 신라인이라는 의미) 이었다는 기록(근거)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필자주 : 그런데도 대당고김씨부인이 재당신라인이었다는 주장을 아직까지도 철회하지 않고 있고, 역사학자라는 사람들도 그 주장에 강력하게 반론을 제..

카테고리 없음 2015.08.28

윤여동설 - 고조선 준왕의 남하로에 대한 반도사관과 대륙사관의 인식차이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조선 준왕의 남하로에 대한 반도사관과 대륙사관의 인식차이 - 최초주장 삼국지 한전을 보면,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했고, 남쪽은 왜와 접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쯤 된다. 세 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중략)............ 진왕은 월지국을 통치한다.........(중략)................. 조선후 준(準王)이 왕을 참칭하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준(준왕)은 그의 근신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쳐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며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그 뒤 준(준왕)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한인(韓..

카테고리 없음 2015.08.22

윤여동설 - 위만의 고조선으로의 망명로와 왕검성 공격로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의 고조선으로의 망명로와 왕검성 공격로 - 최초주장 삼국지 한(韓) 전을 보면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해오는 과정과 왕검성을 탈취하는 과정을 위략의 기록을 인용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를 보면, “위략에 이르기를,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周)나라가 쇠약해지고,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을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하여 주왕실을 보존시켜 주려고 하였으나 그의 대부 예(禮)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고는 예를 파견하여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朝鮮 : 고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해지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쪽지방을 침공하여..

카테고리 없음 2015.08.09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 금관총은 흉노족왕국 이사지왕릉(尒斯智王陵)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 금관총은 흉노족왕국 이사지왕릉(尒斯智王陵) [이사지왕릉(금관총) 출토 금관]                 [尒斯智王(이사지왕) 명문]                  [尒斯智王刀(이사지왕도) 명문]                                                                                                 이사지왕(尒斯智王).......................   그가 어느 나라의 왕이었는지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이제 경주의 금관총이 이사지왕릉임은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금관이 출토되었다고 하여 붙여졌다는 “금관총”이라는 명칭대신 무덤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이사지왕릉(尒斯智王陵)”으로 명명하는..

카테고리 없음 2015.08.01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4군은 북경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4군은 북경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낙양 동북 3,600리에 위치했던 옛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 예전을 보면, “원삭 원년(B.C.128) 예군 남려(南閭) 등이 우거(위만조선의 왕)를 배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요동군)으로 내속하였으므로 무제(전한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무제는 요동군에서 예까지 도로를 개설하려고 했고, 이에 드는 비용을 연(燕)과 제(齊)에서 조달토록 했는데, 워낙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연과 제지역이 매우 소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 창해군은 불과 2년여 만에 폐지되는데, 그 명확한 이유는 전해지지 않았고..

카테고리 없음 2015.07.24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만조선의 도읍은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한나라 원정 기록 기술적·논리적 모순점 지적 연합뉴스 | 입력 2015.07.20. 11:42 (인천=연합뉴스) 신민재 기자 = 기원전 108∼107년 중국의 한무제(漢武帝)가 멸망시킨 위만조선의 수도인 왕험성(王險城)이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인하대 연구팀에 의해 제기됐다. 이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한 뒤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했기 때문에 한반도 일부가 자신들의 영토였다는 중국 학계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인하대 국제관계연구소는 왕험성이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중국 측 주장에 대한 논리적 모순을 밝혀 한반도 북부에 대한 중국의 역사 연고권이 허위임을 증명했다고 20일 밝혔다. 지난 2년간 진행된 이 연구에는 인하대 국..

카테고리 없음 2015.07.20

윤여동설 - 풍납토성은 백제의 위례성(慰禮城)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풍납토성은 백제의 위례성(慰禮城)이 아니다 - 최초주장 [백제 11대 비류왕의 아들인 근초고왕과 12대 계왕의 아들인 무광왕은 대륙백제의 왕위를 놓고 20여년간 왕위다툼을 하게 되는데, 최종으로 근초고왕이 승리하여 대륙백제의 13대 왕위에 올랐고, 패한 무광왕은 한반도로 도망쳐 지모밀지에 도읍하고 다시 백제(이를 필자는 반도백제라 부른다)를 세운다. 그랬다가 반도백제의 모도왕 때 이르러 대륙백제의 개로왕(근개루왕이라고도 한다)이 두 백제의 통합을 제안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통합한 후 반도백제 모도왕의 둘째 손자인 모대가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곧 동성왕이고, 그 뒤를 이어 동성왕의 이복동생인 무령왕이 대륙으로 건너가 백가의 난을 진압하고 대..

카테고리 없음 2015.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