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윤여동설 901

윤여동설 - 마한의 월지(금마저)는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풍윤(豊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마한의 월지(금마저)는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풍윤(豊潤) - 최초주장 마한의 도읍 “월지(月支)”는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월지”라는 곳은 우리 고대 역사에서 유서깊고 중요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는 곳 중 하나이다. 월지는 옛날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 준왕이 기원전 194년에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기고 급히 좌우궁인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쳐 와서 마한의 월지국(月支國)에 다시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한(韓 : 마한이라 했다고도 한다)이라 했다는 곳이다. 그러다가 200여년이 지난 서기 8년에 백제 온조왕에게 도읍이었던 월지(月支)를 빼앗기게 되는데, 온조왕은 그곳 월지(月支)의 지명을 새로이 금마저(金馬渚)라 명명하게 됨으로써 “금마저(金馬渚)”..

카테고리 없음 2014.08.24

화제 - 비전(秘傳)의 채소 “향갓” 그 오묘한 맛

화제 - 비전(秘傳)의 채소 “향갓” 그 오묘한 맛 [문정공팔송 윤황선생종택 안채]    지금 충남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에 가면 민속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윤황선생고택"이 있다.  윤황선생은 조선 선조 4년 신미년(서기1571) (음력) 11월 18일 축시[팔송연보에 의함]에 한성 서문 밖에서 태어나 인조 16년 기묘년(서기1639) (음력) 6월 4일에 69세로 별세하였다.   호는 팔송(八松)이고, 배위는 우계 성혼선생의 딸이며, 명재 윤증선생이 바로 그의 손자이다.  팔송 윤황선생이 활약했던 시기는 조선에 내우외환이 겹치는 시기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 시기를 지나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이괄의 난을 거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던 격랑의 시기였다.         [위 : 팔송 윤황선..

카테고리 없음 2014.08.16

윤여동설 - 고려와 후백제 최후의 전투지 “일리천(一利川)”의 위치

윤여동설 - 고려와 후백제 최후의 전투지 “일리천(一利川)”의 위치 삼국사기 견훤열전을 보면, 견훤은 옛 백제지역인 무진주에서 봉기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전주, 공주 등을 차지한 후 도읍을 전주에 정하게 되나 후일 장자인 신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금산에 있는 절에 석달 동..

카테고리 없음 2014.08.16

윤여동설 - 백제(대륙백제)의 전주(全州)는 지금의 하북성 당산(唐山)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대륙백제)의 전주(全州)는 지금의 하북성 당산(唐山)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9년(A.D.650) 조를 보면, “여름6월 반룡사(盤龍寺)에 있던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나라에서 도교를 숭상하고 불법을 불신한다하여 남쪽 완산(完山)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갔다” 라고 하면서 완산(完山)이 언급되는데, 당시 고구려와 적대관계에 있던 백제 완산주의 고대산으로 갔다는 말로 이해된다. ☆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절들을 바로 이 보덕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는 설화가 있으나 이는 역사적 인물을 끌어들여 절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지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그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이 완산주(完山州)는 전주(全州)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그렇다면 백제(대륙백제)의 전주(全州)는 ..

카테고리 없음 2014.08.09

윤여동설 - 백제 마지막 도읍 사비(泗沘)는 발해 북쪽 지금의 하북성 난현(난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백제 마지막 도읍 사비(泗沘)는 발해 북쪽 지금의 하북성 난현(난주) - 최초공개       [난주고성]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35년(A.D.634) 조를 보면,  “봄2월 왕흥사가 준공되었다. 그 절이 강 언덕에 섰으며, 채색을 하여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왕이 자주 배를 타고 절에 가서 향을 피웠다.  3월 궁궐 남쪽에 못을 뚫어 20여리 물을 끌어들이고, 사면에 양류(수양버들)를 심고, 물 가운데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과 비슷하게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사진 뒤편에 자금탑이 보이는데, 옛날 무왕 때의 망해루로 생각되는 곳이다]      [백제 무왕이 궁궐 남쪽에 물을 끌어들여 못(池)을 만들고 가운데 섬을 방장선산 비슷하게 꾸미고, 수양버들을 심었다고 하였..

카테고리 없음 2014.08.01

윤여동설 - 훈요십조 제8조의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발해 북쪽 하북성 난현(난주) 일원을 말한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훈요십조 제8조의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발해 북쪽 하북성 난현(난주) 일원을 말한다 - 최초주장       훈요십조 제8조의 전체적 내용은,   "차현이남(車峴以南)과 공주강외(公州江外)의 산 모양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의 주군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국가를 혼란하게 하고, 백제가 통합 당한 원한을 가지고 왕을 범하는 죄를 저지르고 난을 일으킬 것이다. 한낱 관청의 노비이거나 진, 역, 잡척에 속한 무리라 할지라도 권세 있는 사람에게 붙어 신역을 면하거나, 왕후, 궁원에 붙어 간사하고 교묘한 말로서 권력을 농단하고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선량한 사람으로 보이더라도 벼슬을 주어 권세를 부리는..

카테고리 없음 2014.07.24

윤여동설 - 고대 요동(遼東)을 중심으로 찾아보는 우리 삼국의 원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대 요동(遼東)을 중심으로 찾아보는 우리 삼국의 원래 위치 - 최초주장     “요동(遼東)”은 “요수(遼水)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요동은 우리 고대 역사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요동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면 우리의 역사강역을 찾아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요동(遼東)”은 우리의 역사강역을 찾아내는 비밀의 열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우리는 지금 한반도 북쪽 요동반도 부근을 요동이라 하며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왔던 곳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곳은 명· 청시기에 지명을 옮겨 놓은 곳이지 고대의 요동은 아니다. 따라서 지금의 요하도 고대의 요수가 아니고, 요하하류는 고대의 요택이 아니다. 지금의 요동반도는 고대의 왜국이었다..

카테고리 없음 2014.07.20

윤여동설 - 백제의 도읍 웅진(熊津)은 발해 북쪽 하북성 진황도 노룡(盧龍)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백제의 도읍 웅진(熊津)은 발해 북쪽 하북성 진황도 노룡(盧龍) - 최초주장 [노룡고성 서문 : 망경(望京)이라고 새겨 놓았는데, 청나라 때에 붙여 놓았을 것이다]             [노룡고성 남문]          [영평부성도 : 진황도 노룡고성도]    지금 중국에서는 청룡하변에 위치한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을 백이·숙제의 나라 고죽국(孤竹國)과 연결시켜 놓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고죽국이 아니라 우리 "백제의 도읍 웅진(熊津)"으로서 그곳에 있는 옛 성터는 바로 웅진성터로 보인다.   우리의 삼국시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본인의 이 주장을 보고 무릎을 탁 칠 것이지만, 그러한 수준까지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한반도의 충남 공주가 백제의 도읍 웅진이고, 부여가 ..

카테고리 없음 2014.07.14

윤여동설 - 당 태종 고구려 침공로와 철군로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당 태종 고구려 침공로와 철군로 - 최초주장 당 태종의 고구려를 침공로를 보면, 정관 18년(A.D.644) 10월 14일에 장안을 출발하여 낙양을 거쳐 정주로 와서 군사들을 출발시킨다. 그리고는 유주, 북평을 지나 요택과 요수를 건너 요동성(현 북경부근)을 점령하게 되고, 다시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11개월 만인 645년 9월 18일에 철군을 결정하게 되는데, 철군로를 보면, 안시성에서부터 정주까지는 갔던 길을 되짚어 왔으나 정주(定州)부터는 방향을 바꿔 병주(幷州 : 산서성 태원부근)를 거쳐 장안(현 서안)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림으로 그려보면 위와 같은데, 어느 사람은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양만춘이 쏜 화살에 눈을 맞아 애꾸가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당 태종이 철..

카테고리 없음 2014.07.04

윤여동설 - 천문미기분야 “연(燕)”나라의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천문미기분야 “연(燕)”나라의 위치 - 최초주장 天文二十八宿 “연경(燕京)”은 연(燕)나라의 도읍(京)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연나라는 모든 역사서에 “천문미기분야(天文尾箕分野)”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천문도 28수(二十八宿) 중 “미(尾)” “기(箕)” 방향에 해당한다는 말로서 동북방향을 이르는 말이다. 연나라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야 하는 것은 연나라가 우리 고대 강역의 서쪽에 바로 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연나라의 위치를 정확히 찾으면 우리 역사 강역의 서쪽 경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연나라는 주 무왕이 소공(召公) 석(奭)을 연 땅에 봉하면서 시작되어, 전국시대 때는 전국칠웅으로 성장하기도 하였으나, 진시황이 연나라를 쳐서 없애고, 5군 즉 요동군, 요서군, 상곡군, 우북평..

카테고리 없음 2014.06.22

윤여동설 - 고려 때에도 명품브랜드 한우가 있었다고?

윤여동설 - 고려 때에도 명품브랜드 한우가 있었다고? 고려사절요 충렬왕 24년(A.D.1298) 조를 보면, “十一月 遣將軍李白超如元獻耽羅牛肉 (11월 장군 이백초를 파견하여 원나라에 탐라소고기를 보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이 “탐라우육(耽羅牛肉”)은 당시에 맛이 좋기로 꽤 유명했던 모양이고, 그 특별한 맛 때문에 원나라 왕실에서 매우 선호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고려에서 원나라 왕실에 탐라소고기를 보냈다는 기록이 남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지방마다 맛이 좋기로 유명한 명품 한우고기들이 판매되고 있는데, 고려시대에는 탐라에서 키운 소고기가 명품한우에 속했을 것이다. 원나라의 도읍 연경과 탐라가 비록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기는 하지만 운송도중의 변질을 막기 위해 양념을 발라 말..

카테고리 없음 2014.06.14

윤여동설 - 태조(太祖) 성한왕(星漢王)은 투후 김일제의 고손자 김성(金星)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태조(太祖) 성한왕(星漢王)은 투후 김일제의 고손자 김성(金星) - 최초주장 휴도왕(休屠王) ↓ 투후 김일제(金日磾) ↓ .......................,..................................... ↓ ↓ 투후 김상(金賞) 김건(金建) ↓ ↓ 투후 김상(金尙) 실명 ↓ ↓ 투후 김국(金國) → 투후 김당(金當) (절손) (김당은 왕망(B.C.45년생)과 이종사촌간으로서 나이도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김당은 왕망과 함께 한(漢:전한)을 없애고 신(新)을 건국하는데 적극 가담하게 된다) ↓ 투후 김성(金星) (이 사람이 바로 성한왕(星漢王)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 투후는 지금의 산동성 하택시 부근을 봉지로 하사받은 제후를 말하는 것인데, 김일제는 ..

카테고리 없음 2014.05.31

윤여동설 - 경주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는 정말로 신라 김춘추의 능비였을까?

윤여동설 - 경주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는 정말로 신라 김춘추의 능비였을까?   [지금 역사학자들이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능이라고 하는 고대 왕릉]       [귀부와 이수 옛사진]                [귀부와 이수의 현재]                                    [이수]                                                              [이수 두전 명문] [이수 두전 8글자 중 6글자분 탁본인데, 기왕에 탁본을 하려면 나머지 2글자도 함께 할 일이지................]                                                                                 ..

카테고리 없음 2014.05.23

윤여동설 - 원래의 탁록(涿鹿)은 지금의 하북성 탁주(涿州)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원래의 탁록(涿鹿)은 지금의 하북성 탁주(涿州) - 최초공개 탁록벌판(涿鹿之野)은 그 옛날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이 국운을 걸고 전쟁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매우 유명한 곳이다. 그리하여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위치를 알고 싶어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탁록이 어디인지 위치를 잃어버렸다. ☆ 지금 중국에서는 북경 서북쪽 관청수고 부근에 있는 지금의 탁록현을 바로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이 다투었던 탁록이라고 하며, 중화삼조당을 세워 관광지로 개발해 놓고 있는데, 그곳은 원래 지명이 보안현(保安縣)으로서 1916년에 이르러 탁록현으로 이름을 바꾼 곳이다. 가짜 탁록이다.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원래의 “탁록(涿鹿)”이라는 곳은 지금의 북경 서남쪽에 위치한 하북성 보정시 “탁주(涿州)” 부근..

카테고리 없음 2014.05.17

윤여동설 - 고려시대 인물들의 묘가 한반도에 없는 이유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려시대 인물들의 묘가 한반도에 없는 이유 - 최초주장 우리 나라 각 가문의 경우, 족보에 기록된 조선시대로부터 그 이후 인물들의 묘는 그 위치가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으나, 고려로부터 그 이전에 살았던 선조들의 묘는 한결같이 실전되었거나 확실하지 않다. ☆ 현재 한반도에 있다고 하는 고려시대 인물의 묘는 그 피장자가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고, 대개 실전되었다가 조선중기쯤에 후손들이 찾아냈다고 하는 많은 기록들이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들 각 가문의 족보를 확인해 보시면 필자가 하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후손이 절손되었거나 후손이 모두 외국으로 이민 등을 가서 선조의 묘를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을 경우 그 위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되고, 또한 집안이 역..

카테고리 없음 2014.05.11

윤여동설 - 한반도의 원래 명칭이 “동국(東國)”이었다고라?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반도의 원래 명칭이 “동국(東國)”이었다고라? - 최초주장 “동국(東國)”이란 동쪽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로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칭할 때 사용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되어 있는 명나라 사람 동월이 지었다는 조선부(朝鮮賦)를 보면, "저 조선은 ........"이라고 하지 않고, “저 동국(東國)은........”이라고 조선을 동국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고려 사람들 스스로도 “고려(高麗)”라는 국호가 엄연히 있었건만 “동국(東國)”이라는 명칭을 공공연히 사용했다. 마치 자기 자신들은 중국(中國) 사람이나 서국(西國) 사람인 듯이............... 고려시대 사람인 이규보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라는 책을 지었고, 또 동국중보(東國重寶), 동국통보(東國通寶) 등이 ..

카테고리 없음 2014.05.04

윤여동설 - 고구려 초기 조나(藻那)와 주나(朱那)의 추정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구려 초기 조나(藻那)와 주나(朱那)의 추정위치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6대 태조대왕 20년(A.D.72) 조를 보면, “봄2월 관나부(貫那部 = 灌奴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쳐서 그 왕을 사로 잡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 고구려 13대 서천왕의 동생 이름도 달가(達賈)로 나타나는데, 동명이인이다. 같은 책 태조대왕 22년(A.D.74) 조를 보면, “겨울10월 왕이 환나부(桓那部 = 順奴部) 패자(沛者) 설유를 보내 주나(朱那)를 쳐서 그 왕자 을음을 사로 잡아 고추가를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기록 속 조나와 주나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태조대왕은 평생에 강역을 많이 넓혀 고구려의 기초를 튼튼하게 닦았는데. 특히 북쪽, 동쪽..

카테고리 없음 2014.04.26

윤여동설 - 임유관(臨渝關)의 원래위치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임유관(臨渝關)의 원래위치 찾기 - 최초주장 수서 고구려전을 보면, 원(고구려 26대 영양왕)이 말갈의 기병 1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를 침공하였으나 영주(營州)총관 위충이 격파하여 쫓아버렸다. 수나라 고조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량(諒)을 원수로 삼고 수군과 육군을 총동원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는 한편 조서를 내려 (고구려 영양왕)의 작위(상개부 의동 삼사 요동군공 고구려왕)를 삭탈하였다. 이때 군량수송이 중단되어 6군의 식량이 떨어지고 또 군사들이 “임유관(臨渝關)”을 지났는데 전염병이 돌아 왕사의 군사가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요수에 도착하자 원(고구려 영양왕)도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문을 올렸는데, “요동 분토의 신 원 운운” 하였다. 고조는 이에 군사를..

카테고리 없음 2014.04.06

윤여동설 - 수 양제 고구려 침공시의 좌12군 우12군 기록의 진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수 양제 고구려 침공시의 좌12군 우12군 기록의 진실 - 최초주장 수 양제 고구려 2차 침공 기록을 보면, 611년 여름 4월 “(수) 양제의 행차가 탁군의 임삭궁에 이르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涿郡)으로 모여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수 양제의 군사출발지가 탁군이었음을 알게 하고, 612년 봄 정월 임오일(초2일)에 수 양제가 내린 조서를 보면, “고구려의 하잘 것 없는 것들이 미욱하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와 갈석사이(勃碣之間 =渤碣之間))에 모여들어 요와 예의 지경(遼獩之境=遼濊之境)을 자주 침범하여 왔다” “거란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바다 수비병들을 죽였으며, 말갈의 습속을 본받아 요서(遼西)를 침략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탁군, 발해와 갈석, 요, 거란, 요서 등의 지명이 언..

카테고리 없음 2014.03.30